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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성제 수필가
설성제 수필가

잘 나가던 국숫집이 문을 닫았다. 코로나 비상시국 일 년 만에 국수 가락 끊어지듯 손님들의 발걸음이 끊어져갔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다. 바이러스 틈으로 업종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발버둥을 칠 때 하종 씨도 앞에 하던 건축 일을 접고 이 문 닫힌 국숫집을 인수했다. 국수 대신 만두로 종목을 바꾸었다. 배달하기 좋고 테이크아웃하기도 쉽게. 코로나가 어서 사라지길 기대하며 마음 푸근하게 앉아있고 싶은 식탁도 몇 개 놓았다. 유동인구가 많은 길목이라 그동안 진 빚을 금방 갚을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하며. 

하종 씨가 가게를 차렸다고 백 살 되신 어머니, 옥 할머니가 집을 나선다. 꽃이 달린 빵모자를 쓰고 유모차를 끌며 가게로 향한다. 할머니가 주무실 때 손녀가 발라놓았다는 다홍빛 매니큐어가 자목련 봉오리처럼 열 손가락 끝에 피었다. 안경 없어도 바늘귀가 보이고 저만치 떨어져서 하는 말도 다 들리는 옥 할머니. 총기가 총총하시다. 남 판단하지 않으시며 남 욕보이지 않으시며 남 성가시게 하지 않으셔서 누구에게나 인기 많으신 할머니다. 봄볕도 옥 할머니를 따라가느라 느리디 느린 정오다.

아들네 만두 가게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다. 먼저 도착하셔 손님처럼 앉아계신다. 옆집에 사는 자야 할머니가 만두를 산다고 이내 팔을 흔들며 나타난다. 달선 할머니, 복숭 할머니도 개업을 축하하러 온다. 

전날 옥 할머니 집에서 쿵당 거리는 소리가 들려 가보았다. 할머니 넷이 마스크를 끼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윷놀이를 하고 있었다. 민숭민숭 노는 것보다 동전 몇 닢이라도 깔아놓고 윷을 던지면 윷가락이 펄쩍펄쩍 뛴다며 내기까지 했다. 하필 제일 젊은 자야 할머니가 돈을 땄다. 따 봤자 만두 한 판 값이나 될까 싶지만 언제나 남에게 대접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야 할머니이신 데다 달선도 복숭도 매한가지시라 이들은 분명 만둣집에서도 서로 계산하겠다며 실랑이를 벌이실 게다.

하종 씨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두를 차려 나온다. 옥 할머니가 만두 맛을 묻는다. "앗따 행님! 말할 게 뭐 있소? 최고지 최고!" 할머니들의 주름진 입이 쩍쩍 벌어지며 만두가 사라져 간다.

날이 어두워지자 옥 할머니가 나를 찾아오신다. 봉투를 내밀며 겉봉에 글을 써달라는 것이다. 봉투 안에는 지폐 50만원이 들어있다. 기초노령연금으로 월세 내고, 아끼고 아끼며 생활하시는 줄 뻔히 아는데 어디서 이런 큰돈이 생겼는지 의아하다. 

"아들이 그동안 잘못 살아온 거 있다면 깨닫게 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만두집 잘 되게 해 주세요. 부자 되고 우리 며느리 손자손녀 모두모두 건강하고 복 있는 사람 되게 늘 지켜주세요."

나는 부르시는 대로 또박또박 적어 한 번 더 읊조려드리니 미소가 번진다.

옥 할머니의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나 역시 그러하듯 부모님께 용돈 드리기 쉽지 않아 옥 할머니의 봉투가 예사롭지 않다. 분명 아들 며느리 모르게 찼던 뒷주머니 같다. 요긴하게 쓰일 때를 대비해서, 언제 가실지 모를 그날에 자신의 장례비용이라도 손 벌리고 싶지 않으셔서 싸매 두었던 뒷주머니.

언젠가 색연필 몇 자루와 색칠공부책자를 사다 드렸더니 덜컹 2만원을 내놓으셨던 그 쌈지다. 그날 색연필 값이라며 얼마나 끈덕지게 가져라 하셨는지 모른다. 몰래 이부자리 밑에 넣어두느라 혼쭐이 났다. 그것 말고도 옥 할머니의 꼬깃꼬깃한 뒷주머니는 내게 들킨 적이 몇 번 되지만 그때마다 옥 할머니는 시치미를 뚝 떼듯 능청스럽게 웃으시며 치마를 훌러덩 뒤집어 속곳 속으로 집어넣으셨다.

부모는 백 년을 살아도 자식을 뗄 수 없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자식 생각뿐이다. 멀리 있는 자식 가까이 있는 자식 할 것 없이 자식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준다. 자식에 대한 섭섭함이나 자식의 잘못을 기억하기도 싫어하며 언제나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세상 어미들이 차는 뒷주머니의 이유다. 자식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 자식의 아픈 말 다 못하고 숨겨놓은 마음의 뒷주머니를 세상 모든 어머니들은 하나씩 둘러차고 있는 것이다.

옥 할머니가 유모차를 주차하신다. 계단 손잡이를 부여잡고 한 칸 한 칸 올라서 엘리베이터를 타신다. 할머니의 고정 자리, 앞자리에 앉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기도를 하신다. 옥 할머니의 비워낸 뒷주머니에 하늘의 신령한 복이 차오르길 나도 기도한다. 만두가게에서 마스크 위로 초승달 웃음 짓던 하종 씨의 눈빛이 반짝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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