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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등
 
권주열
 
기타만 보면 그런 생각이 난다 케이스에 담겨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채 방 한구석에 우두커니 놓인 기타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내 앞을 걸어가고 있다 그의 앞에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앞을 지나가고 있다 등과 등 아무도 기타를 매지 않았는데도 등등 기타소리가 난다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도 내 등을 한참 보며 따라올 것이다 내 뒤는 누굴까 하긴 얼굴을 알 필요가 있을까 대면은 깊이를 사라지게 한다 나뭇가지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떨어지는 꽃, 꽃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다 걷는 것만이 걸어가는 일, 벚꽃과 목련꽃 등등 꽃이 지고 있다 어쩌면 이 줄의 맨 끝에 따라오는 사람은 기타를 등에 매고 올 것 같다 그의 등에 팽팽하게 예비된 표식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해
 
등들이 한없이 밀려오고 있다
 
△ 권주열: 2004년 '정신과 표현'으로 등단. 시집 '바다를 팝니다' '바다를 잠그다' '붉은 열매의 너무 쪽' '처음은 처음을 반복한다'.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나는 이 시의 제목에서 기타소리를 듣는다. 그러니까 '등~등~' 하고 현 울리는 소리를 들려주고 나서 시의 첫 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등(等, '기타 등등'처럼 같은 종류의 것이 더 있음을 나타내는 말)과 고개를 숙인 채 줄지어 가는 사람들의 등과 기타 줄이 울리는 소리 '등~등~'을 넘나들며 시를 읽는다. 시각과 청각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어 재미있다. 하지만 시의 분위기는 고요하고 쓸쓸하다. 그 기타는 악보대로 음을 풀어내지 못하고 먼지 낀 케이스에 담긴 채 방 한구석에 우두커니 놓여있다. 그야말로 문장의 중심을 벗어난 '기타 등등'의 자리에 실제 악기 기타를 배치하고 있다. 그래서 소리가 낮고 어둡게, 등, 등, 울리며 시 전체에 배경으로 흐른다.
 이 시에 나오는 사람(혹은 사물)은 모두 뒷모습뿐이다. '앞'은 위치표시를 위한 공간으로만 있고 독자에게는 '등~등~' 소리를 내며 쓸쓸한 연주를 하고 지나가는 뒤만 보여주고 들려준다. 나뭇가지에서는 '목련, 벚꽃 등등'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떨어진다. 길로 떨어져 그 꽃길을 걸어가는 사람 또한 앞사람의 등을 보고 따라가고 있다. '걷는 것만이 걸어가는 일'이나 '대면은 깊이를 사라지게 한다' 등, 툭툭 시의 중간에 던져 둔 진술을 풍경 속으로 녹아들게 하여 한 없이 밀려오는 등으로 마무리한다. 마치 한 문장을 '기타 등등'으로 마무리하여 그 속에 많은 이름을 넣어두는 것처럼.

 권주열 시인은 세 번째 시집 '붉은 열매의 너무 쪽'에 이어 이번 시집 '처음은 처음을 반복한다'에서 말(언어)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부사 '너무'는 새로운 방향을 나타내는 공간이 되고 '멀리'는 자주 쓰다듬으며 가까이 두고 싶은 생명체가 된다. 또한 보조사'은/는'이나 격조사 '이다'처럼 소위 '기타 등등'의 자리에서 일만하고 있던 말(품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시 속에서 주인공 자리에 앉혀 둔다. 그가 말문을 열고 안내하는 새 세상은 신선하고 재미있다. 그의 시 '토씨 이발소'는 어른과 아이가 함께 뛰어 노는 언어들의 놀이터처럼 무궁한 상상의 세계를 빚어낸다. 그런 새로운 인식의 공간은 이 순간에도 더 깊이 숨어있는 문을 열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김감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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