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숙제 어른숙제
김기람
땡볕 누그러진 해거름인데
대문 앞 채우는 푸른 함성들 아직 날지 못한다
방학 삼십여 일 내내
집집마다 지청구만 새어 나온다
녀석들의 희망으로 골목 차 올린 그땐
개학은 까마득히 멀기만 한데
어미는 그림에 아비는 도공에
팔자에 없는 예술에 빠져 있다
어지럽게 걸려 있는 문구 속
개구쟁이 숙제는 내 숙제가 되었다
아무리 쥐어짜도 지나간 날씨는 난감한데
코 박고 한 숨 쉬는 어린 로댕에게
마실 나온 사람조차 한 마디씩 거든다
아 그날 비가 왔었지
아니야 그때 뽑은 바랭이 금방 말랐더라
한 달치 일기는 오밤중에야 완성된다
후련해진 마음 비로소 평상에 누이는 한밤
달빛은 대낮으로 내려와 작은 가슴을 품는다
교육이란 미명 아래
세상을 동여매는 넝쿨들
주인은 간곳없고 객이 설친다
거르고 거르는 일 우리의 숙제가 아닐는지
△김기람: 경남 함양 출생, 문학세계(2014) 시부문 신인상, 수필세계(2019) 수필부문 신인상, 대구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수필부문(2018) 시 부문 청림문학상(2019). 울산문인협회, 울산남구문학, 에세이울산, 수필세계작가회, 한국에세이 포럼 회원. 시집 '청보리 푸른바람(2014)', 수필집 '기억 속의 수채화(2020)'.
김기람 시인은 초등학교에서 오랜 세월동안 재직하다 교감으로 퇴임을 했다. 학교 현장에 있었기에 초등학교 재학 중인 손주들의 마음도 누구보다 더 가까이에서 읽을 수가 있었으리라. 하여 손주의 숙제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 시의 행간마다 사랑으로 묻어 나온다.
'코 박고 한 숨 쉬는 어린 로댕에게
마실 나온 사람조차 한 마디씩 거든다
아 그날 비가 왔었지
아니야 그때 뽑은 바랭이 금방 말랐더라'
이 시에는 마을이 살아있고, 이웃이 살아있고, 할머니의 열정과 사랑이 살아있다. 신나게 한 달을 놀다 개학을 하루 앞둔 손주는 코 박고 한 숨 쉬는 로댕이 된다. 보다 못한 할머니는 숙제를 시작한다. 한 달 치 일기를 쓰기위해 하루 낮 하루 밤을 빌린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불가능을 모르는 어머니 경력이 있고, 초등학교 선생님의 관록이 있는 할머니가 아닌가. 그까짓 한 달을 거슬러 가는 것쯤은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두벌 새끼일이 아닌가.
돌아보면 다시 머물고 싶은 참 아름다운 순간들일 게다. 이 시는 초등 선생님이었던 할머니의 노련한 시각과 사유가 깃들어 있어 그 서정이 참 다정하고 따뜻하다. 하여 한 달 내내 놀기에만 열중한 손주도 할머니에게는 그저 귀여운 '어린 로뎅'으로 환치된다.
골목길에 깔깔대는 개구진 웃음소리, 동글동글 호박덩이 닮은 까무잡잡한 얼굴들이 한 없이 그리운 오늘이다. 코비드의 오늘, 골목도 죽었고 웃음도 죽었다. 아이숙제를 두고 동네사람들이 함께 걱정해 주던 그 날로 되돌아 갈 수는 없을까? 내 질문에 지금은 세상을 동여매는 넝쿨들이 너무 많단다.
하여도 나는 아이숙제 어른숙제의 김기람 시인의 시에 한 참 머물러 본다. 아파트 마당에서 동글동글 개구진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서금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