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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화 수필가
윤경화 수필가

들꽃 한 다발을 아침 식탁에 올렸다. 세상의 색을 모두 모아 식사를 마련한 듯 밝고 따듯하다. 커튼을 걷자 곱고 얇은 햇살이 보글거리는 된장 뚝배기에 내려앉는다. 맑은 얼굴에 주름살이 늘어가는 마주 앉은 남자가 반가워할 상차림인 듯싶다. 우리 부부가 한 달에 두 번 가질 수 있는 여유롭고, 귀한 시간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일 중독자처럼 쉬는 날이면 오히려 일을 더 많이 하느라 주변의 변화에 눈길조차 주지 못하고 하루를 소진했다. 최근엔 좀 느긋해졌다. 풀을 뽑다가도 새로운 녀석을 만나면 인사가 길어지고, 기념촬영도 잊지 않는다. 이웃에 누가 이사라도 오면 꽃모종을 종류별로 상자에 가득 담아 선물도 한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불편하거나 안 좋은 것도 있지만 좋은 점도 더러 있는 것 같다. 매사에 서두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아는 일이다. 느린 걸음은 무시로 주변을 살피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 좋다. 나눔도 수평적이며 가볍고 단순한 것이 좋다는 것도 알겠다. 젊은 날의 나눔 속에는 나의 과시욕도 들어있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나눔의 본질이 무색해질 때도 있었다. 나만이 느끼는 일은 아닌 듯하다. 울과 담의 경계 없이 지내는 이웃의 안주인 역시 가볍고 단순한 관계의 묘미를 알아차린 것 같다. 

 장 볼거리라고 해야 갈치 두어 마리와 마른 찬거리, 그리고 인절미 몇 조각이 전부지만 그녀는 오일마다 언양장에 간다. 우리 집으로 오는 그녀를 보면 장날인 것을 안다. 가볍고 단순하게 나누는 재미를 보기 위해 떡 봉지를 달랑거리며 들고 오는 그녀의 걸음이 즐거움과 가벼움으로 넘친다. 그녀와 나는 팥고물을 금방 무친 달고 구수한 인절미 맛에 푹 빠진다. 살아가는 속도를 조금 늦추니까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보이고, 말하지 않아도 손톱이 닳도록 열심히 산 세월이 보였다.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니
비로소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
무던한 묵언 동행도 
서로에게 선물


 갑자기 한줄기 골바람이 올라오자 산책로의 나무들이 서로 몸을 비비고 흔들어댄다. 고달픔의 아우성이 아니라 생명의 환희로 다가온다. 그녀와 나를 스쳐간 바람 또한 고단함이 묻어 있는 듯하지만 삶을 노래한 환희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과거에는 알 수 없는 허기 때문에 쫓기듯 신간(新刊)을 사던 때도 있었지만 근래에는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책을 잘 사지 않는다. 예전에 읽었던 책 가운데 다시 열어보고 싶은 것을 읽기도 한다. 세월의 때가 묻어 누리끼리한 책에는 특유의 묵은 내가 배어 있다. 그런 책을 마주할 땐 저자를 비롯해 편집 관계자와 발행인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존경심이 생긴다. 물론 한 장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도 고무줄이다. 가끔 세월 저쪽의 시간에 끌릴 때는 오랫동안 유추하고 상상하는 유희에 빠지기도 한다. 그 시간 속에서 나의 정서는 축복을 받은 듯 호사를 한다. 어떤 글은 필사도 하는데 오래전에는 단순히 베끼기 수준의 필사를 했던 것 같다.   

 최근에 법정 스님의 글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철없을 때 시건방지게 스님의 세계를 들락거렸다. 길을 가다가 호기심에 길가의 집을 들여다보듯 조합을 이룬 활자의 겉모습에 반해 성의 없이 책장을 넘겼다. 부지런하지도 않고 진중하지도 못한 습관 때문에 시간을 버리고, 겉멋만 늘어 빈 병처럼 미풍에도 윙윙거리고 시장기를 느낀 적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 별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 안달하고 싶지는 않다. 

 스님의 세계를 다시 방문하면서 나의 내면에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예전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거나 나그네처럼 잠시 둘러보고 지나간 느낌이었다면 필사를 하는 요즘은 작가와 동거인 또는 가족 같은 심리를 경험하고 있다. "세상에 속절없이 '무소유' 화두 하나 던지시고 스님 혼자 죽을 고생만 하다 가셨네요"라며 싱겁게 중얼거린다.

 '아름다운 마무리' 중 '놓아두고 가기'에는 결벽증에 가까운 스님의 '무소유'적인 살이 단면이 그려지고 있다. 만년에 길상사에서 사월초파일 행사를 마치고 강원도 오두막으로 돌아가실 때의 일이다. 수행자의 지나치게 소박한 공양을 잘 아는 공양간에서 자동차에 음식을 실어드렸는데 스님이 자책을 한다. 입으로는 '무소유'를 떠들면서 대중이 먹을 음식을 개인적으로 더 가지고 가는 일은 온당치 못하다며 삼십여 리 떨어진 마을의 삯일하는 집에 가져다 놓고 돌아온 일을 쓰고 있다. 공양간의 신도들은 수행승의 건강을 염려해 챙겼을 것이지만 스님의 '무소유' 해석은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병을 얻어 당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많은 사람에게 신세를 지기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다 삶의 마지막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 사이 세상에 던진 화두 무소유는 보통명사가 되어 만인의 입으로 순례를 하는 동안 본래의 의미는 퇴색되고 말만 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말의 유희로 여기는 듯도 했다. 필사하던 손길을 잠시 멈추고 또 한마디 한다. "그러니까, 스님만 생고생하셨다니까요. 근래에는 청렴한 공직자들마저 무소유가 아닌 소유의 상징이 되었어요. 인간의 유전자를 변형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기라요" 혼잣말이 잦다는 생각에 홀로 있어도 민망하다. 스님의 글에는 수행자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고독이 문장의 행간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병들고 아프면 기가 빠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생명의 본질은 유한성이다. 누구나 아는 이 사실을 잊은 채 앞서가려 애쓰느라 놓치는 것이 많았던 시절이 있었다. 생의 행로에 무던한 묵언 동행도 서로에게 선물이다. 느리게 가면 뒤따라 오던 것과도 만날 수 있다. 잠시 멈추면 작고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른 아침 텃밭의 상추 사이에 홀로 우뚝 선 광대나물꽃이 형형한 성자의 눈빛처럼 아름답다 못해 신비롭다. 놓칠 뻔한 귀한 순간과의 조우다.  

 인간은 생로병사의 경험이 끝나는 날 자유를 얻는다. 그날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오지만 대개 사람들은 마음속에 자신은 불사조와 같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마저도 좀 느긋해질 수 있는 시간이 온다는 것은 축복이다. 마냥 좌충우돌하며 사는 것보다는 다행한 일이 아닌가. 나는 요즘 하루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기보다 몇 무더기, 때로는 한 무더기로 둘 때도 있지만 그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을 힘닿는 데까지만 하는 날도 있다. 나름의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각별한 맛이라고 여긴다.  

 오월이면 거처 한쪽 귀퉁이에 홍단풍이 곱다. 무성하게 어우러진 붉은 숲보다 오래된 나무의 허리통에 돋아나는 몇 가닥의 선홍색 여린 잎에 반하고 있다. 이 멋 또한 삶의 속도가 느려지고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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