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파도
  • 김감우
  • 2021.06.0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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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감우 시인

파도
 
오창헌
 
가끔 바다를 보고 온 날은
마음이 저절로 풀어진다
둘째는 시험이 끝나
친구들과 찜질방에 갔고
오랜만에 집에 온 
새내기 대학생 첫째는
곧 랩 공연이 있을 거라며
은근히 허락받고 싶은 눈치다
그래! 경험도 쌓고 잘 되었네 하니 
기분이 좋아 친구 만나러 간다
한동안, 만화 보지 마라
게임하지 마라 잔소리하던 내가
끝말을 해라로 바꾸니
아이들이 들뜬다 그 기운이
아이들의 그릇에 담긴다
아빠가 바다를 보고 왔을 뿐인데
아이들 마음이 금방 채워진다
밀물과 썰물 사이
수천 수만 년의 되새김이
하루도 거르지 않는 그 꾸준함이
잠가둔 내 문까지 부숴버린 것일까
흉내도 못 낼 저 무한 반복의
파도를 보고 온 날은
인심 한 번 쓰게 된다
내 속에 숨어든 푸른 무늬 결이
저절로 파도를 친다
 
△오창헌: 1999년 '울산작가'에 시 발표하며 등단. 시집 '이상한 일이 요즘엔'(1991·변의수 등과 공저). 시노래북음반 '울산이라는 말이 별빛처럼 쏟아져 내리네'(2008·정일근 등과 공저). 시집 '해목'(2018). '고래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모임' 대표.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이 시를 처음 읽을 때 참 편안한 맛이었다. 시에서 자분자분 들려주는 일상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풍경화이다. 가끔 바다를 보고 온 날은 마음이 저절로 풀어진다는 시작이나 바다를 보고 온 날은 크게 인심 한 번 쓰게 된다는 마무리가 잔잔한 수면 같은 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 속에 있는 큰 파도는 시를 다 읽고 나서 밀려들었다. 뭘까, 시 속에 그려진 바다는 어제도 오늘도 묵묵히 반복되는 움직임일 뿐인데 이 시의 조용한 물결에서 내안의 잠자던 큰 파도를 찾아내는 힘은 뭘까. 나는 그것이 이 시의 느리고 매듭 없는 문장의 속도라고 생각한다. 가슴이나 머리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닌 몸으로 밀고 가는 글이 주는 힘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 반복되어온 한결같음이 있어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날 시인이 보고 온 바다는, 밀물과 썰물 사이 무한반복의 되새김은 시인 자신의 삶이고 자화상이다. 아빠가 바다를 보고 왔을 뿐인데 그 힘으로 아이들은 들뜰 수 있고 그 기운으로 아이들의 그릇이 채워지는 것도 바다, 즉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보고 왔기에 가능한 것. 

 살면서 마음을 풀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정답을 알고 보는 시험처럼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하지만 그 공간은 어느 날 갑자기 툭 떨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 희로애락을 함께 껴안고 뒹굴며 생겨난 화석같이 단단해진 자리, 이 시에서 바다는 그런 근원의 공간이다. 그래서 오창헌의 시집 '해목'에 있는 바다와 파도는 시인과 한몸으로 보인다. 
 김감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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