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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가에서 왕업 이룬 석탈해. U울림통(28)

가야에서 대업에 실패하고 환갑을 넘겨 62세에 신라 4대왕에 오른 석탈해(昔脫解) 이사금은 키가 9자 7치 (약 2m 추정 : 1자 약 20cm 당시 도량 기준 ) 였다고 한다. 

 또한 용모 뿐만 아니라 매우 지혜로웠다고 한다. 

 장창호 작가는 바다 너머 나라(용성국) 왕비에게서 알(卵)로 태어난 석탈해는 금관 가야에서 김수로와 힘 겨루기에 패하고 큰 깨닮음을 얻어 신라에 이르자 그 땅의 문화를 받아 들이고 신망을 얻기 위해 애썼다고 추론하고 있다.

 석탈해 탄생 설화에는 아진포 포구(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에서 바닷 고기를 잡아 임금에게 바쳤던 노파 '아진의선(阿珍義先)'이 어느날 바다서 밀려온 배가 있어 살펴 보니 길이 20자 넓이 13자나 되는 나무 궤작에 어린 아이가 있어 길렀으나 7일만에 떠났다고 한다. 

 이때 배에서 까치가 울어대 까치 작(鵲)자에서 '새 조(鳥')자를 떼고 '석(昔)'자로 성을 삼고, 궤를 풀고 나왔으니 '벗고 풀었다'는 뜻으로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였다 한다. 

 서라벌 동악(東岳 토함산)에 이른 석탈해는 양산(楊山) 아래 호공(瓠公)의 집터를 보고 길지(吉地)라 여겨 숫돌과 숯을 땅에 묻는 계책을 꾸며 그 집을 뺏어 살았고 이 사실에 그를 지혜로운자라 판단한 남해 차차웅의 눈에 들게 된다. 

 본래 왜인인 호공은 남해왕의 선왕 박혁거세와 연관된 인물로 허리에 박(瓠 호)을 차고 다녀 '호공'이라 불렸다는 사료가 남아 있다.

 그러나 집을 빼앗은 석탈해 아래에서 신하로 지내며 굴욕의 날을 이어가던 호공. 

 재상(대보 大輔)의 벼슬까지 오른 그는 훗날 계림에서 김알지가 태어난 황금 궤작을 발견하니 이는 석씨계 왕에서 김씨계로 왕위 계보가 바뀌는 반전 속 반전의 인물이 된다.

 석탈해와 김알지의 출발점인 '나무궤작 VS 황금궤작'. 

 적어도 외관상 비교될수 없는 궤작이다. 

 신라 왕조 계보을 이은 석씨는 김씨와 8대를 번갈아 이어가다 내물왕계인 제19대 눌지왕과 제29대 태종무열왕기에 이르러 두번이나 멸문지화에 가까운 권력 축출을 당하게 된다. 진행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경주시 동천동 석탈해왕릉과 비석의 모습. 2021. 1. 10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경주시 동천동 석탈해왕릉과 비석의 모습. 2021. 1. 10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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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 보기 : 장창호TV [29] 석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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