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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숙 수필가
강이숙 수필가

따사로운 햇살이 창살에 스며든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거실 창가로 갔다. 겨우내 앙상하던 재스민 나무에 눈길이 닿는 순간 오밀조밀하게 파릇한 무엇인가가 꽂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깨알 같은 새순들이 뾰족뾰족 올라오고 있는 게 아닌가. "우와!" 탄성과 함께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출근 준비도 잊은 채 이 상서로운 기운 앞에서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다.

디자인 광고업을 하던 동생이 이태 전 봄에 가게를 정리하고 서울로 가면서 주고 간 것이었다. 꽃이 특별하고 향이 오래가니 잘 키우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봄기운이 한창 무르익는 4~5월에 걸쳐 연보라색 꽃을 무수히 피웠다. 며칠이 지나면서 차차 이팝나무꽃 같은 흰색으로 변하더니 한 달 가깝게 온 집안에 짙은 향을 선사해 주었다. 밤낮으로 들여다보며, 다투듯 피어나는 꽃잎의 수를 헤아리고 잎에 낀 먼지도 닦아 주며 애정을 쏟았다. 새삼 오래전 자식 키울 때 일이 아련히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다. 그 자식도 하나둘 품을 떠나고 휑한 공간을 메울 반려견이라도 키워 볼까 생각해 보았지만, 직장 일 때문에 자신이 없어서 접었다. 대신 실내에서 키울 수 있는 식물로 관심이 옮겨 갔다.

가라앉은 집안 분위기가 꽃나무 하나로 밝고 향기로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느 날 나에게로 온 재스민은 애완견 못지않은 정을 빼앗아 갔다. 흡사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때가 있는 법, 여름 초입에 들어서며 하나둘 꽃을 떨구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무성하던 잎까지 자꾸 떨어져 나갔다. 꽃이 지는 건 받아들이겠는데 잎이 왜 떨어지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거의 화초들이 그러하듯 실내에 있으면 꽃은 져도 잎은 온전히 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거처를 옮겨오면서 환경이 맞지 않아서인가 전전긍긍하다가 동생 가게 기온과 비슷하게 맞추려고 베란다로 옮겨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사이 꽃은 다 지고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는 떨어진 잎을 주워 모으며 그만 심신이 지쳐 갔다. 밥맛도 잃었다. 신이 나던 집안일도 시들해지고 매사에 힘이 나지 않았다. 가을이 채 오기도 전에 겨울 나목처럼 앙상한 가지만을 남겼다. 저 무거운 화분을 바깥으로 어찌 들어내나 걱정이 되었다. 화사하던 집 분위기도 침울했다. 베란다에도 서늘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그렇게 반짝 짧은 환희를 주고 간 게 야속했다. 점차 관심에서 멀어지고 잊히어 갔다.

오늘 아침, 새삼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말없이 새순을 피워주는데 그동안 내쳐 두었던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제야 나는 네이버 지식 코너를 기웃거렸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는 소멸과 성장이 있다는 자연의 이치를 하나하나 터득해 나갔다. 재스민은 화초가 아니라 나무이고 옷을 벗은 가지 곳곳에 볼록하게 솟아있던 게 겨울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신비한 비밀을 숨겨 놓은 나무가 사랑스러웠다.

본연의 소임을 다하고 소리 없이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미치자 식물 생장의 기본 원리의 무지함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음은 날아갈 듯하고 세상 어느 것도 부럽지 않았다. 그토록 애태우던 마음에도 다시 안도와 희망의 싹이 텄다.

이제 곧 은은한 향을 머금은 연보라 꽃을 오종종하게 피워 낼 것이다. 나는 또 멈춰서 오래 보며 생명의 경이로움에 동화될 것이다. 간단없는 삶 속에서 때때로 소소한 일상이 벅찬 기쁨을 안겨줄 때가 있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에도 정성을 다해 교감하며 마음의 여유를 누리고 사는 것도 정신 건강에 필요한 일이다. 다시 찾아온 계절의 맥박 속에 생명의 숨결과 온기를 느끼며 두고두고 애정 어린 관찰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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