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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순 수필가
배정순 수필가

비대면 강의 수업 중이었다. 
 "사진 찍겠습니다, 얼굴 좀 보여주세요." 출석 체크를 하겠다는 주문이다. 집행부에서 인증샷이 필요하다고 하니 피할 수도 없다. 이 일을 어쩌나, 얼굴을 내보이기는 정말 싫은데. 
 내가 사진 찍기 싫은 데는 이유가 있다. 일전에 가스레인지 사용 부주의로 머리를 태워 버렸다. 불을 켜 놓고 엎드려 물건을 꺼내는 틈에 머리에 불이 옮겨붙었다. 옆 지기가 쫓아와 화재 진압에 나섰지만 이미 머리는 밑동만 남긴 채 타버린 뒤였다. 

 진짜 이유는 또 있다. 첫 수업 때 카메라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면서부터다. 젊은 회원들 모습은 희고 반지르르 윤이 나는데 내 얼굴은 시렁에 걸린 매주처럼 누리끼리한 데다 주름살이 한가득 이었다. 상대적 박탈감이랄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필이면 머리숱이 많아야 인물이 사는 가르맛자리 머리를 시원스럽게 날려버렸다. 오디오만으로도 참여할 수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줌을 열 때면 오작동으로 자칫 화면에 얼굴이 노출될 세라 비디오 지우기 버튼을 잽싸게 눌렀다. 한데, 이 상황에 면상을 공개하라니…

 그동안 마스크를 써서 좋은 점 일 순위가 화장 안 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머리 감고 롤 마는 게 일상이었는데 코로나 재난 이후 미용실, 염색, 색조 화장과는 담쌓고 살았다. 모자, 마스크, 안경까지 끼게 되니 어차피 얼굴에 공들여 봐야 공염불이지 싶어서다. 그렇다고 듣고 싶은 강의를 작파할 수도 없고, 당장 급하니 곁에 있는 모자를 얼른 덮어썼다. 검은 얼굴에 검은 모자, 카메라를 통해 드러난 내 얼굴은 여자가 아니었다.  

 다음 수업하는 날, 옆머리를 올려 빗고 며느리가 놓고 간 스프레이를 뿌려 각을 잡아 보았다. 워낙 빈모인 데다 불에 탄 흔적이 커 가릴만한 머리숱도 없었다. 모습이 하도 기괴해 다시 모자를 썼다. 집안에서 모자를 쓴 나를 보면 그들이 뭐라 할까. 늙은이 멋깨나 부린다고 웃지 않을까. 누가 물은 것도 아닌데 모자를 쓰게 된 사연을 줄줄이 늘어놓는 마음, 그 마음은 무엇인가. 

표정은 마음의 거울
애정으로 나를 다독이다 보면
주름진 얼굴도 밝게 살아나겠지


 그즈음 어느 TV프로에 대머리 노인이 등장했다. 빡빡 밀고 나온 대머리에 유난히 눈길이 꽂혔다. 파격적인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옷차림도 범상치 않았다. 빨강 양복에 밤색 구두, 시쳇말로 나이답지 않게 끝내주는 슈트발이었다. 
 그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머리인 게 힘들었다고 했다. 여러 가지 발모용 치료제도 써 보았지만, 효과가 없어 아예 가발을 쓰고 다녔다. 퇴직하고 난 후 굳이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싶어 아예 삭발을 감행했다. 신경 쓰이던 머리를 확 밀어버리고 나니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더란다. 그 근거가 빡빡 민 대머리요, 젊은이도 소화하기 힘든 붉은 슈트가 아니었을까. 그는 '왕과 나'에 출연했던 멋있는 대머리 배우 '율 브리너'를 소환해 자신과 견주었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단점을 장점으로 바꾼 그의 용기가 가상했다. 

 사람이 늙으면 신체의 기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내가 가스 불에 머리를 태운 것, 핸드폰을 냉장고에 넣어 놓고 찾는 것도 젊어서는 없던 일이다. 몸 기능 저하에서 오는 노년기의 정상적인 현상이다. 그런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고 타박하는 건 자연을 거스르는 행위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애면글면 살아온 내 인생을 무위로 만드는 꼴이 아닌가. 

 그새 머리가 제법 길었다. 수업 날, 자신을 끌어안듯 머리를 정성스럽게 감고 흠을 가리기 위해 올백으로 롤을 말아 스프레이로 마무리했다. 이건 남의 눈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순전한 나 자신에 대한 애정표현이다. 한껏 치장한 나에게 선생님의 한 말씀, "모자를 벗고 나오시니 훨씬 좋아 보이네요!" 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데도 금방 호의적인 반응이 따른다. 기분이 꽤 괜찮았다.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은 늙어도 변함이 없다. 드러나는 모습은 나이만큼 변하는데 마음은 그대로이니 아이러니다. 생전에 친정어머니가 모처럼 만난 나에게 머리염색을 부탁하곤 했었다. 그럴 때면 귀찮아서 '이 나이에 누가 봐 줄 거라고 이러시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요즘 그러고 있다. 알려고 하지 않아도 삶이 친절하게 삶이 대답한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자신의 모습이 안쓰러워 그러는 거라고.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우수가 서린 어두운 표정 위에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안쓰럽다. 40대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들 한다. 대머리야 어쩔 수 없다지만, 내 표정은 마음먹기에 따라 포실하게 가꿀 수도 있었는데…


 나이를 더할수록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다. 우리 부부는 손자 재롱 볼 때 말고는 함께 웃을 일이 없다. 티브이에 아가들이 나오는 "슈돌" 프로를 챙겨 본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귀여운 모습을 보노라면 굳은 얼굴에 웃음이 살아난다. 표정은 마음의 거울, 마음을 다독이다 보면 비록 주름진 얼굴이라도 밝은 표정이 살아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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