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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권력의 정점(頂點)이면서, 동시에 정계 은퇴를 준비하는 자리다. 특히 우리와 같이 5년 단임제 헌법에서는 더 더욱 그렇다. 임기 6년의 대법관은 임명장을 받은 하루만 즐겁고, 나머지는 수도승의 고단함뿐인 '창살 없는 감옥'이라 했다. 기쁨은 잠시고 영광을 지키기가 그 만큼 어렵다는 함의가 아니겠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4주년을 넘기기 무섭게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다. 자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집권여당을 스스로 탈당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더욱이 임기 1년을 앞두고 당정협조 고리마저 끊은 격이다. 군인이라면 무장해제와 다를 바 없다. 온 몸으로 국정을 마무리 짓고, 국민과 역사의 심판을 받겠다는 각오 없이는 불가능하다. 물론 야당의 기획탈당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 어차피 원내1당이 아닐 바에 굳이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데다, 남은 국정을 수행하는 데 있어 야당의 협조도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유효한 카드로 판단했을 수 있다. 야당이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거국내각 구성에 필요한 기반조성의 수순으로도 탈당은 필수다. 특정 정당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초당적으로, 공평무사하게 인사를 하겠다고 하면 믿을 야당이나 국민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헌정사에서 임기 막바지의 대통령이 탈당을 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네 번째다. 5년 단임제 이후 예외 없는 행보다.

 

   단일 대선후보 조정 포석
 기획탈당으로 보는 야당의 시각에는 또 다른 음모론도 있다. 즉 범여권의 단일후보를 견인해 나가는데 있어 현 열린우리당의 당적 보유는 걸림돌이자 무용하다고 판단했지 않았느냐는 추론이다. 어차피 깨진 당이다. 그러면서도 당 잔류파나 탈당파 모두 초록은 동색이다. 야당 후보가 결정되고 난 이후 잔류파 주도의 통합신당 대통령 후보건, 탈당파에서 옹립한 후보건 간에 이들은 결국 '단일화'길을 갈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면 대통령의 역할은 막중하다. 거중조정자로서 마지막 방점을 찍겠다는 포석에서 단행한 결정으로 보고 있다. 당선가능성이 최우선인 선거에서 야당 후보를 압도할 수 없는 후보간의 합종연횡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더욱이 현 집권세력은 권력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한번 놓치면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경험으로 터득했다. 야당이 말하는 '잃어버린 10년'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가설은 일종의 공포다. 때문에 정권재창출이라는 역사적 명제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좌고우면할 시간이 없다. 더욱이 현 정권을 만들어낸 집권세력이나 노 대통령 본인의 정치 스타일과도 맞지 않다. 여권의 제 계파가 일단은 각계약진하다, 어느 시점에 후보를 단일화하고 야당 후보에 총공세를 퍼부을 경우 얼마든지 승산이 있다는 것이 이들의 계산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국민적 이목을 집중시킬 빅 이벤트도 충분히 준비하고 있다. 흥행성이 높은 강호의 인재들을 대상으로 집요하게 러브콜을 보내는 것도 이 일환이 아니겠는가.

 

   하산 길에는 모두가 겸허
 게다가 '9. 19 공동성명'이후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북핵문제가 '2. 13 합의'로 급물살을 타면서 이것이 어떤 시너지효과로 국민여론에 반영될지 예단할 수 없다. 야당에서 최악의 대선 시나리오라는 '북한 핵 포기'와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그동안의 '뺄셈정치'를 한꺼번에 날리고도 남는다. 또한 노 대통령 집권4년을 보수언론 중심으로 끊임없이 폄훼해 왔지만, 우리 역사발전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공로도 적지 않다. 세명대학교 김용옥 석좌교수가 지적했듯이 노 대통령을 너무 각박하게만 평가할 일이 아니다. 잘 한 것은 잘 했다고 해야 한다. 권력과 재벌간의 고질적 병폐인 정경유착을 끊어냈고, 대통령에게 집중됐던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타파했다. 더욱이 최저생계비마저 스스로 벌 수 없는 저소득층 보호와 영유아 보육비 지원은 우리나라를 복지국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아직 가시적인 결과물이 나오지 않고 있는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와 부동산안정화조치 등도 올해 안으로 상당한 진척이 있을 것으로 보여, 이 역시 여론반전에 적잖은 작용을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정제되지 않는 대통령 발언과 국정경험이 미숙한 참모들의 시행착오로 '바람 잘 날 없던 4년'이었지만, 남은 1년은 전혀 새로운 모습일 수 있다.
 탈당과 함께 민생안정, 남북화해에 올인 하겠다는 대통령의 선언이 무게를 더하는 요즘이다. 하산 길에는 모두가 겸허해지기 마련이고, 서산의 노을에 등을 보이는 나그네에게 적의를 품지 않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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