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버지이자 외할아버지였던 법흥왕(法興王)이 죽자 7세에 왕위에 오른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삼맥종 三麥宗).
울산 천전리각석과도 인연이 깊은 있는 인물이다.
각석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드러난 원명(原銘) 중 진흥왕의 아버지 '입종갈문왕(법흥왕의 동생 : 사부지갈문왕)'의 이름이 남아 있고 추명(追銘)에는 외할머니 '보도 부인 (保刀夫人)'과 어머니 '지소부인 김씨(只召夫人金氏)' 도 이름을 새겨 서석골(書石谷)에 다녀간 흔적을 남겼다.
눌지 마립간(백제 비유왕 毗有王)기 부터 백제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어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을 막았다.
진흥왕은 더나아가 백제 성왕(聖王)의 사위가 되어 동맹을 더욱 굳건히 했으나 당나라를 오가는 당항성 (黨項城 경기도 화성 일대)의 물길 한강을 두고 신라의 첫 정복 군주로서 감추었던 속내를 드러내고 백제의 왕성 풍납토성과 한강 하류를 차지한다.
또 남으로 낙동강 유역 대가야의 창녕 땅을 북으로 백제의 영토인 한강 하류와 남한강과 소백산을 넘어 고구려(양원왕) 영토인 단양에서 함경남도 함흥평야에 이른다.
이사부(異斯夫), 거칠부(居柒夫)와 금관가야 출신인 김무력(金武力, 김유신 장군 할아버지) 등 장수들의 활약이 큰 몫을 했고 돌궐에게 공격 당한 고구려는 남쪽에서 쳐들어온 신라·백제 연합군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백제, 가야, 고구려 3개국 땅을 흡수해 국토를 크게 넓히며 삼국시대의 균형을 깨트리고 최강자로 부상한다.
진흥왕 정복 전쟁은 자신이 직접 둘러 보며 경남 창녕의 창녕비, 북한산의 북한산비(국보 제3호), 함남의 황조령비, 함남 이원의 마운령비 등 4곳에 순수비(巡狩碑)와 단양의 적성비(赤城碑) 등에 남아 있다.
화랑도의 전신인 원화제도를 만들어 젊은 여성 인재들을 양성했다.
많은 생명을 앗은 정복 전쟁으로 번뇌가 있었을까 ?
43세에 숨은 거둔 진흥왕은 말년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다.
왕비도 비구니가 되었다. 황룡사가 이 때 지어졌다. 진행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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