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상수 수필가
이상수 수필가

종종걸음 치며 사람들이 고사장 안으로 걸어온다. 이리저리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눈빛에선 일말의 긴장감과 결연함이 함께 느껴진다.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응시자의 연령층이 다양하다. 

지난 4월, 초중등학교 졸업학력검정 고시가 있었다. 시험 당일인 토요일에 응원차 시험장으로 나갔다. 봄인데도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 문득 입시한파란 단어가 떠올랐다.

응시자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일주일에 한 번 재능 기부하러 다니는 울산 동광학교 학생들이었다. 합격을 기원하며 물과 도시락을 들려 보냈다. 합격은 못하더라도 몇 과목은 좋은 성적을 받아 낙담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보기도 했다. 검정고시는 평균 60점을 넘으면 합격이다. 몇몇은 한두 과목 통과만 남겨놓고 있었다. 합격자 발표일은 5월 중순이었다.

발표하기 며칠 전, 학교 뒷산 아까시나무마다 어린 꽃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활짝 피기 전 버선처럼 생긴 모양의 꽃을 양봉업자들은 버선발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며칠 내에 꽃이 활짝 필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예보이기도 하다. 

학생들의 사연을 듣다 보면 눈물이 난다. 가난한 살림에, 더욱이 딸이라는 차별로 학교에 가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배우지 못한 한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하며 눈가를 훔칠 땐 나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글을 몰라 아이들 숙제를 봐줄 수 없어 한없이 미안했고, 자식이 좋은 옷과 신발을 사주어도 속이 빈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은행에 갈 때는 아픈 척 멀쩡한 팔에 붕대를 감고 가서 글 쓰는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전남 곡성에는 시인 할매들이 산다. 시집와서 60여 년간 한 마을에서만 살았던 어머니들은 글을 몰랐다. 오로지 고단한 시집살이와 가족만이 전부였던 삶이었다. 

이름 석 자 적는 게 소원이었던 어매들은 모진 세월 견뎌내고 나서야 글을 배웠다. 이 동네로 이사 온 누군가가 마을 사람들을 위한 도서관을 열었고 정리를 도와주러 온 할머니들이 책을 거꾸로 꽂는 것을 보고 한글을 가르치게 됐다. 더는 남에게 글을 빌리지 않아도 되자 자신의 인생이 담긴 시를 써 내려갔다. 

"잘 살았다, 잘 견뎠다, 사박사박" 

이들의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져 영화제에도 출품됐다.

경주 황리단길 어느 학교 담벼락에는 '지금 너의 모습을 가장 좋아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약간 비뚤거리게 꼭꼭 눌러쓴 이 글자체는 칠곡할매글꼴이다. 칠곡군이 뒤늦게 한글을 깨친 할머니 중 개성이 강한 글씨체를 선정해 제작했다. 어려움을 겪던 어르신들이 난생처음으로 한글을 배우고 쓴 손글씨가 컴퓨터용 글꼴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글씨체 원작자의 이름을 딴 칠곡할매 권안자체, 이원순체, 추유을체, 김영분체, 이종희체 등 5가지가 있다. 지금은 한글 프로그램에 정식으로 등록됐고 국립 한글박물관은 이를 영구 보전하기로 했다고 한다.

수업 시간이 되면 나이든 학생들은 어두운 귀와 굽은 허리,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자신과 싸운다. 내용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지만 운 좋게 머릿속에 들어오더라도 오래 머물지 않아 또 속상해한다. 결석하면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어렵게 설명해서 흥미를 잃은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이튿날 꼬깃꼬깃 접은 종이에 영어단어를 적어와 질문할 땐 반가운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학교는 무료로 운영된다. 모든 수업이 교사들의 재능기부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뜻있는 독지가들의 후원금이나 필요한 단체의 기부 물품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소모되는 비용을 충당한다. 어떤 교사들은 요양원에 계시거나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이들에게 정성을 다한다.

매주 화요일, 나는 설렘을 안고 교문을 들어선다. 하얀 머리카락은 기본이요, 보청기에 돋보기를 낀 나이 많으신 어른들이 90분 동안 꼼짝 않고 앉아 영어 발음 규칙을 배운다. 더듬더듬 단어를 읽는 사이, 교실에는 웃음꽃이 만발한다. 

기다리던 합격자 발표가 났다. 우리 학교에서는 중등과정과 고등과정에서 최고령 합격자가 나왔다. 허리가 아파 내내 서성이며 수업을 들었던 분의 이름을 발견했다. 온몸이 떨리는 질병의 고통 속에서 수학 문제를 풀던 분도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엊그제까지 버선발이던 어르신들이 활짝 피어났다. 한 단계를 마무리한 학생들은 이제 다음 과정을 준비 중이다. 이들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열어놓은 창으로 아까시향이 지천으로 풍겨온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