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金春秋)는 진지왕의 손자이며 진지왕의 아들과 선덕여왕과 자매인 천명부인(天明夫人) 사이에 태어났다. 부인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文姬)로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춘추는 진덕여왕이 숨지자 상대등 알천(閼川)과 왕위 경쟁 끝에 진골계로 처음 왕좌에 오른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陵)이다. 할아버지 진지왕이 황음(荒淫)에 빠져 폐위돼 아들은 성골에서 진골로 골품이 떨어지는 '족강(族降)'이라는 수모를 당한다. 이에 왕위 계승 서열 밖으로 밀려나고 진흥왕 큰 아들 동륜(銅輪)의 아들 백정(白淨)이 왕위에 올라 진평왕이 된다.
우여곡절 끝에 춘추는 진덕여왕에 이어 51세에 왕위를 이어 큰 집안 진평왕(동륜계)쪽에서 작은 집안 진지왕(사륜계)쪽으로 80여년만에 왕좌가 돌아왔다. 아들 법민(法敏, 문무왕 文武王)도 태자로 봉해져 진지왕 후손들이 36대 혜공왕까지 왕위를 이어갔다.
장창호 작가는 김춘추의 부인이자 유신의 여동생에 관한 오줌 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寶姬)가 동생 문희에게 자신이 꾼 꿈을 얘기했다. 꿈에 보희가 금성의 서악(西岳) 서형산(西兄山, 선도산 仙桃山)에 올라 소변을 보았는데 그 소변이 서라벌 시내에 가득 찼다고 한다. 문희는 그 얘기를 듣고 언니에게 비단 치마를 꿈 값으로 주며 그 꿈을 샀다.
어느날 오빠 유신이 왕족 춘추를 집으로 데려와 축국(蹴鞠)을 하다 옷깃이 찢어져 보희(寶姬)가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나서지 않자 문희가 바느질로 옷깃을 꿔맸다. 얼마후 문희가 아버지를 알수 없는 아기를 가졌는데 유신이 가문의 수치니 불태워 죽이겠다고 하며 문희를 기둥에 묶고 장작을 쌓아 불을 질렀다.
때마침 선덕여왕이 산에 올라 서라벌을 바라보는데 연기를 보고 그 연유를 물어 유신 집에 일어난 일을 알게 된다. 여왕이 뱃속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묻자 옆에 있던 조카 김춘추가 망설이다 자백을 하고 여왕의 명을 받아 유신의 집으로 달려가 문희를 구하고 그녀에게 장가 들어 아들 법민(法敏 문무왕)을 얻었다. 이 모든 것이 유신·문희 남매가 한편의 드라마 처럼 잘 짜여진 공동 각본이었던 것을 왕실에선 눈치 채지 못했는 모양이다.
훗날 태어난 김춘추의 차녀는 외숙부 유신에게 시집을 가니 지소부인(智炤夫人)이라 불리며 무열계 왕실의 메신저 역활을 했다. 춘추와 유신이 각각 딸과 두 여동생으로 정략 결혼을 연거푸 이어간 것은 신라 골품신분제라는 정치적 한계를 극복하고 입지와 동맹을 다지기 위한 노력이었다. 서악동 고분군 옆에 보희 꿈 설화가 있는 새골못이 지금도 있는데 일명 보희 연못이라 불리운다. 정리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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