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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정경아
수필가 정경아

광복절 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2박 3일의 짧은 여행이었다. 파란색 줄무늬 옷을 입은 남편과 야자수가 그려진 원피스를 입은 나는 여름휴가를 즐기려는 인파 속에 합류했다. 결혼이라는 큰 행사 뒤에 다가올 일들은 알 길이 없었고 함께 부대낄 수많은 여름도 이제 시작이었다. 종려나무 잎이 바람에 하느작대며 우리를 맞았다.

 렌터카를 빌려 애월 해수욕장에 갔다. 비취색이었다. 깊지도 않고 잔잔해 물속을 걸어만 다녔는데도 좋았다. 서로를 향한 작은 말소리도 놓치지 않을 새라 붙어 다녔다.
 호텔의 여름밤은 쉬이 잠들지 않았다. 용이 화염을 뿜어대는 쇼가 여름밤을 달뜨게 했다. 광장 중앙에는 뷔페가 마련되어 있고 주변 물길에는 사람들이 곤돌라를 타고 즐겼다. 시원한 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밀려와 부서지는 희붐한 파도가 보였다. 결혼이라는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설레지만 낯설었다. 마치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난다고 착각이 드는 '마녀의 시간(witching hour)' 같았다.

 다음 날,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러 갔다. 길가의 한라봉 직판매장에 차를 세우고 들어가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값을 깎으려는 자와 그래도 어림없다는 주인과의 팽팽한 신경전에서 남편이 승리를 했다. 우린 몇 만 원이나 더 이득을 봤다고 좋아했다. 

 정방폭포 근처 식당에 들렀다. 시뻘건 양념에 도톰한 갈치와 큼직하게 잘 익은 무가 졸여져 나왔다. 양념에 밥을 비벼 한 그릇을 시원하게 비웠다. 부랴부랴 정방폭포를 찾았다. 바닷가 근처에 들쭉날쭉한 돌무더기 위에 폭포가 쏟아졌다. 가까이 가려면 돌을 디디고서야 해서 뒤뚱뒤뚱 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느라 분주해 보였다. 남편과 나는 포만감에 졸음이 몰려왔다. 우두커니 폭포만 보다가 사진 찍을 생각도 못 했다. 그때 선글라스 낀 아저씨가 다가왔다. 

 "사진 찍어 줄게. 저기 폭포 앞에서 포즈 취해 봐요" 
 다짜고짜 남편 목에 걸고 있던 고가의 DSLR 카메라를 자기에게 넘겨 달라고 했다. 멍한 상태였던 건지 순순히 카메라를 넘겨주었다. 
 "다른 포즈도 취해 보소"
 "조금 더 뒤로, 조금 더 뒤로 가 봐요"

 한 장이라도 충분한데 아저씨는 자꾸만 셔터를 눌러댔다. 폭포의 전경을 다 담으려는지 아저씨도 점점 뒤로 물러났다. 나는 아저씨가 카메라를 들고 가 버리지 않을까 조바심이 생겼다. 걱정을 하면서도 우리는 아저씨가 하자는 대로 다 했다. 땡볕에 굳이 수고로운 연출을 담당하는 아저씨의 당당함에 압도되었다. 남편은 아저씨가 눈앞에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지만 동요하는 눈빛이었다.
 폭포 아래서 실컷 사진을 찍히고 나서야 남편은 아저씨에게 카메라를 받으러 다가갔다. 
 "3만 원에 해 줘"
 선글라스를 쓴 아저씨의 시선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 정방폭포 꼭대기를 보고 있지 않았나 싶다. '3만 원'이라는 말에 생략된 상황들을 재빨리 찾았다. 아저씨는 관광지에서 기념사진을 찍어서 파는 사람일 테다. 요즘은 다들 성능 좋은 카메라와 핸드폰으로 찍어도 충분하기에 아저씨의 일감이 줄었으리라. 어리숙한 우리가 아저씨의 타깃이 된 것이었다. 남편이 말없이 돈을 건네자 아저씨는 폭포 근처 후미진 곳에 차려진 작업대로 돌아가 담배를 한 대 물고 본인의 작전이 성공했음에 안도하는 듯했다.

 즉석에서 현상되어 나온 사진은 손바닥만 한 액자에 담겼다. 정방폭포를 배경으로 우리는 경직되어 나란히 서 있었는데 어쩐지 어린 시절 봐 왔던 부모님 사진 같았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저씨는 함께 찍힌 사람들을 지워버리고 우리만 남겨 놓았다. 결혼생활이라는 무대에 막 오른 두 사람이 써 나가야 할 이야기를 남겨 놓은 듯했다.

 아저씨에게 건넨 3만 원은 한라봉을 샀을 때 더 깎았다고 좋아했던 금액일지 모른다. 인생은 이득을 볼 때도 있지만 또 손해를 볼 때도 있으니 그만한 행불행은 감사해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가 찍었던 신혼여행 사진들은 노트북 어딘가에, 이제는 수고로이 찾지 않는 클라우드 안에 잠들어 있다. 아저씨가 만들어 준 액자만이 신혼여행을 기념하는 유일한 사진으로 한동안 안방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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