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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뷔페'
'공부 뷔페'

손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은 낡은 시집을 한 권 들고 화장실로 향한다. "엄마 빨리 나와!"라는 딸아이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문을 딸각 잠가버리고 변기에 걸터앉아 낡은 시집을 넘긴다. 
 애절한 사랑시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그리움과 아픔을 노래하는 목마른 시인이 되기도 한다. 냄새나는 작은 공간에 걸터앉아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시집 한 장을 열면 김소월의 진달래 향이 불어와 때 아닌 봄을 물어다 놓고, 또 한 장을 넘기면 서정주의 국화향이 솔솔 코끝을 스치는 가을을 앞당겨 놓고, 또 한 장을 넘기면 김남조의 겨울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이 바다 냄새를 몰고 와서 나를 겨울 바다로 데려다 놓는다.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한여름 작은 공간을 향기롭게 마법을 걸어 사계절을 한꺼번에 느껴본다.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서 학창시절의 문학소녀가 되어보는 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시집을 접어 마법을 푼다. 변기의 물을 내릴 시간이기 때문이다. 

 "엄마 왜 이제 나와!"라고 큰소리로 눈까지 부라리고는 문도 안 닫고 옷부터 내리는 8살 딸아이는 룰루랄라 노랫소리 높여 가며 만화 주제곡을 멋들어지게 한 곡 부르더니 "나뭇가지에 실처럼 날아든 솜사탕……." 꾀꼬리 같은 목소리 한층 고조된 기분으로 동요 솜사탕을 불러댄다. 목소리 조금만 낮춰 불러줄 것을 경고받을 때는 목소리 좀 작아지나 싶더니 이내 구구단 5단으로 더 소리 높아진다. 이다음에 자라면 성악가도 되고, 과학자도 되고, 피아니스트도 되고 싶다던 꿈 많은 아이, 가끔은 보던 만화책도 들고 들어가고 동화책도 들고 들어가지만, 빈손으로 들어갈 때는 무반주에다가 관객 없는 저만의 무대에서 매일 독창회를 한다. 
 동요, 구구단으로 하루도 결석하는 일 없는 딸아이에게는 꿈나무 가지에 싹을 틔워 나오는 학교 교실의 축소판이기도 하고 모녀지간에 안방화장실은 5분짜리 작은 독서실이 되고, 공연장이 되기도 한다. 변기에 걸터앉아 율동하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으로 여기며 생글생글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나오는 딸아이를 보며 눈웃음을 보내준 것이 어제 오늘 같은데 그 딸아이가 벌써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친정에 몸조리한다고 와있는데 이런 글을 쓰면서 연신 미소와 웃음만 흘러나온다.
 김시민 선생님의 '공부 뷔페'와는 좀 어울리지 않는 반대의 성향으로 배불리 먹고 나올 수는 있는 공간은 아니지만, 지금도 가슴 가득히 먹고 나오는 나만의 공간이기도 하다.

서순옥 시인
서순옥 시인

 김시민 선생님은 부산MBC아동문학 대상을 받았고 서덕출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아빠 얼굴이 더 빨갛다' '자동차 아래 고양이' '별 표 다섯 개' 등의 동시집을 출간했고 현재 울산 아동문학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시민 선생님은 매일 어린이를 만난다는 내용으로 프로필 첫 줄을 시작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어서 그런지 공부와 관련된 작은 아이들의 이야기로 동시집을 장식해놓았다. 아이들만의 웃고 우는 애환을 놓치지 않는 그려놓은 동시집에서 특히 '올백' '자존심' '감기 합창단' '이야기 반찬' '흰머리' '돌고 돌아 제자리' '낙엽' '산타 할아버지의 양말' 등 추천하고 싶은 제목의 동시다. 이제는 손녀 손자들을 위해 안방화장실에 작은 독서실을 만들어 '공부 뷔페'로 만찬을 차려줄 계획이다.
 
# 공부 뷔페 
"실컷 먹었는데/또 먹을래요/배불러 죽겠는데/자꾸 먹을래요/영어 메뉴도 뜯어 먹고/수확 메뉴도 꼭꼭 씹어 먹었어요/문제집도 잘 발라먹었고요/숙제는 소스를 쳐 가며 가득 먹었어요/소화가 되면 또 먹을게요/나 배불러요/엄마, 그만 먹으면 안 될까요/" 
 서순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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