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의 둘째 아들이자 효소왕의 동생인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은 36년간 통치하며 신라의 전성기를 누렸다.
양귀비에 푹 빠진 당나라 현종(玄宗)은 삼국통일로 악화된 신라와 외교를 개선해 신강국 발해의 영토 확장을 저지해야 했다. 신라도 영유권(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인정 받고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 들였다.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고 국학(國學)에서 유학(儒學)을 장려해 나라의 틀과 제도를 넓혀 나갔다.
어느날 신라의 왕궁에 추문이 나돌았다. 궁궐에는 두 왕비가 있었는데 낮에는 왕비인 대소왕비(성정왕후 成貞王后)가 있고 밤 왕비가 따로 있다는 소문이었다. 성덕왕은 외숙부(김순원 金順元)의 도움을 받아 15세 어린 나위에 왕위에 올랐기에 그의 입김이 국정 운영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소문이 퍼져 나가던중 대소왕비가 까닭 없이 출궁을 하게 되고 왕은 외숙부 딸이자 외사촌 동생인 점물(占勿, 소덕왕후 (炤德王后)을 계비로 맞이했다. 얼마후 대소왕비 사이에 얻은 맏아들 중경(重慶)도 알수 없는 이유로 죽게 된다.
결국 왕위는 소덕왕후 사이에서 낳은 승경(承慶, 효성왕孝成王)과 헌영(憲英, 경덕왕景德王)이 차례로 잇는다.
장창호 작가는 대왕으로 칭송 받았던 성덕왕도 외척에 의한 트라우마가 있었으리라 짐작하며 왕가의 아픔을 극복하고 신라를 강건히 지킨 성덕왕의 구민 정책 등을 전하고 있다. 정리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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