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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향 시인
심수향 시인

그립다는 이 흔하고 익숙한 단어가 이제는 입에 착 달라붙는 말이 되었다. 이전까지 살던 내 평범한 일상이 모두 그리운 것이 되어버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코로나19가 세상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고 무엇보다 내 생활을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무료하고 불만스러웠던 일상이 잃고 나서야 비로소 얼마나 소중한가 알게 되었으니 나는 참 어리석은 사람이다. 

 나는 칠십대다. 나이가 많아지니 어려움이 많아졌다. 눈앞에 선한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새로운 용어 하나 익히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나마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이 다반사다. 이럴 때면 나는 끝없이 퇴보하고 있구나 하는 자괴감과 불안감이 차올라 우울하다. 게다가 여기저기 수반하는 통증이 괴로운 하루를 만들어내니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안과 우울을 극복하기 위한 처방은 뭔가 넉넉히 챙겨 먹고, 시장을 다녀오고, 친구들 만나 수다 떨고, 계모임이나 동인들과 밥 먹고 떠들고 하면 조금은 우울감이 덜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이 평범하고 다소 불만에 차 있던 일상을 코로나19가 하루아침에 바꾸어버렸다. 몇 명 이상 만나지 말고, 밥 먹고 차 마시고 떠드는 일도 삼가라는 등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이 권고 수칙이 발표된 후, 이전의 탐탁잖게 생각하던 나의 일상이 그리 달콤하게 생각될 수가 없다. 이걸 보면서 내가 얼마나 간사스러운 동물인가 알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친구들과 여름 우기가 오기 전 가벼운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시작은 다른 친구가 열고 있는 전시장에 다녀오기 위한 사전 모임 중에 시작되었다. 우리는 반년 이상 만나지 못한 아쉬움과 준비해 두었던 여행에 대한 간절함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모임을 안 것처럼 친구 며느리가 깜찍한 여행 제안을 해 온 것이다. 예의로 던진 낚시를 우리가 덥석 물어버린 셈이 되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여행에서 나는 참 소중한 것 하나를 얻어올 수 있었다. 

 불교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이 있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뜻이다. 이번 여행도 친구 며느리의 제안이 없었다면, 세 친구의 간절함이 없었다면, 그것을 기획해준 그 아들 내외의 마음이 없었다면 이번 여행이 이루어졌을까?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어 마음으로 끝난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는 것 아니던가. 사실 나는 낯선 경기도에서 운전한 것은 처음이었다. 낯선 지명과 모르는 길을 천천히 달리는 우리 차를 위협하듯 스치는 차들에게 '미안해요. 이해합니다' 중얼거리고 기꺼이 한쪽으로 비켜서서 보내주었고, 즐거이 하하 웃었다. 평소 너희도 늙어봐라 중얼거리던 그 마음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모든 것이 편했다.

 엉뚱한 이야기지만 친구가 검정 보리를 기른 이야기도 마음이 만든 예쁜 일이다. 친구 며느리가 충청도 어느 마을에 봉사 간 적이 있는데, 그 마을 산물로 요리해서 나누어주는 봉사였단다. 행사장 옆에 사시는 연로한 할머니께 음식을 갖다 드렸고, 그날 밤 답례로 검정 보리 한 통을 고맙다고 가져오셨고, 그 보리를 며느리는 시어머니께 드렸고, 검정 보리를 처음 본 시어머니는 또 지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보리차를 만들려고 씻는 과정에 쓰레기통으로 흘러들어간 몇 알의 검정보리가 싹을 틔웠더란다. 그것을 본 지인이 소중히 뜰에 옮겨 한 줌 보리를 수확했고, 그 보리를 친구에게 다시 나누었고, 친구는 이듬해 밭에 심어 한 되의 검정보리를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차 안에서 웃으면서 들었지만 친구 며느리의 마음, 할머니의 마음, 시어머니의 마음, 지인이 쓰레기통에서 건져낸 마음. 결국 검정보리는 여러 마음과 마음이 기른 성과물이다. 

 여행의 묘미는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뭔가 얻을 때 더 귀해진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얻어온 것은 마음의 소중함이다. 국가 방역 수칙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마음, 코로나19가 오기 전의 일상을 소중히 돌아보는 마음, 여러 사람의 마음이 키워낸 검정보리라는 따뜻한 마음을 나는 얻어 온 것이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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