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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

황주경
 
아버지의 가계부는
세월이 가면서 점점 빛바랜 영광이 되어갔다
 
뒤란 궤짝에 버려져
잊혔던 놈을 꺼내 딱지로 만들었다
 
동무들과 어울려
팔이 빠지도록 딱지 치던 날
딱지 속에서 먼 고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풀어헤쳐 자세히 살펴보니
어린 새끼를 등에 업은 말향고래 한 마리
숨구멍으로 급하게 물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위태롭게 쪽배를 탄 아버지가 물귀신처럼 포효하며
푸른 파도 춤추는 바다 깊숙이
작살을 던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가계부는 한 마리 말향고래의 항해일지였다
 
△황주경 :경북 영천 출생. 울산대 대학원 환경공학 졸업. 2005년 '문학21' 문학상. 2012년 '문학과 창작'신인상. 울산민족예술인총연합 부이사장 역임. 처용수필회장 역임. 한국작가회의 회원, 울산시 보도기획 비서관으로 재직. 시집 '장생포에서'

도순태 시인
도순태 시인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고래가 살까? 꺼내도 꺼내도 또 다른 고래가 시인들의 호명아래 나오니 말이다. 시인이 깨운 말향고래, 길이가 10m에 이르는 대왕오징어를 잡아먹기 위해 심해로 잠수하는 노고가 우리 모두의 아버지를 닮은 듯도 하다. '어린 새끼를 등에 업은 말향고래 한 마리' 마치 매일 매일 조마조마하면서 써 내려갔을 아버지의 가계부였던 것. 가난의 냄새가 바다처럼 출렁이었을 그 시절 아들은 딱지를 만들어 부자가 된 듯 종일 신나게 친구들과 놀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북한 딱지는 아버지의 염려가 가득 담긴 시인의 유년이 암각화 된 것은 아닐까.
 
 '딱지 속에서 먼 고래 울음소리'에서 시인의 서늘한 마음이 단적으로 보이는 것 같다. 아버지의 고단한 삶이 낡은 옷처럼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불안이 뒤란에 버려져 있었기에 두려웠음은 아닐까. 아니면 고서의 묵은 냄새 같은 순간적인 아버지에 대한 반감은 아닐까. 그러나 시인은 거대한 바다를 향해 돌진하는 건장한 아버지를 추억함을 볼 수 있다. 또한 가족의 생계를 짊어져야 하는 家長의 무게를 '작살을 던지는' 성실함을 은근히 표현하고 있다. 그 옛날 아들에게 가계부를 일기처럼 묵묵히 쓰는 것을 보여준 아버지, 시인 안에 지울 수 없는 고래로 남은.
 
 시인은 어떤 종류의 고래로 살까? 여름 장생포앞바다에 먹이를 잡으며 힘차게 유영하는 참고래떼 무리 중 한 마리는 아닐까, 항해 일지에는 녹음의 바다가 일렁이는 날들이 많았음 좋겠다. 깊은 곳에서 사이렌(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요정)이 울면 작살 던지는 소리 요란하겠다, 향해 일지는 바빠지겠지. 딱지 놀이하는 골목은 어디에도 없는데.  도순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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