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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왕생이
삽화. ⓒ왕생이

가니 아프가니스탄 전 대통령이 국외 탈출 때 가져갔다는 현금다발이 세간의 화제다. 탈레반에 쫓겨 달아날 당시 1억 6,900만달러(약 1,979억원)를 챙겼다는 의혹이 외신을 타면서부터다. 승용차 4대에 가득 싣고 수도 카불을 벗어났다는 현지 통신의 보도에 억장이 무너지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을 게다.

게다가 그를 추종하는 정치인도 200명 이상 동반했다니 기가 막힌다. 도주 행각의 클라이맥스는 준비한 헬기에 돈 보따리를 실으려 했는데 모두 들어가지 않아 일부를 활주로에 남겨둬야 했다는 것이다. 한 나라 대통령의 처신치고는 너무나 부적절하고 비겁해 실소를 금치 못한다. 그러려고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아프가니스탄 국방장관 권한대행은 트위터를 통해 "가니 대통령 일행이 우리의 손을 묶어 놓고 국가를 팔아 먹었다"고 비판했다. 정치 라이벌인 압둘라 국가화해최고위원회 의장도 "신이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가니는 조끼 한 벌과 신고 있던 샌들만 챙긴 채 아프간에서 추방당했다고 항변하고 있다. "학살을 막기 위해 카불을 떠났다"는 해명도 군색하기 이를 데 없다. 도무지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듯하니 참으로 한심하다.

문화인류학자 출신으로 세계은행에서 근무한 뒤 아프간 재무부 장관을 거쳐 2014년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결코 보여서는 안 될 한 나라 지도자의 모습에 '몰염치(沒廉恥) 세상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줬다'는 비아냥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소설 '남한산성'에서 최명길의 읍소가 떠오른다. '전하,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옵니다. 군병들이 기한을 견디듯이 전하께서도 견디고 계시니 종사의 힘이옵니다. 전하, 부디 더 큰 것들을 견디어주소서'

국가적 위난에서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놓지는 못할망정 먼저 도망친 왕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정치를 파국으로 몰아갔다는 점이다. 추종자들 사이에는 부정과 부패가 일상이었고 패거리 문화가 판을 치면서 '내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했다. 관리와 토호들의 수탈로 백성들은 곳곳에서 울부짖는데 고관대작들은 '내로남불'의 명분과 실리 싸움으로 날 새는 줄을 몰랐다. 백성의 한탄은 그들의 파열음에 묻혀 귀에 들릴 리 만무했다.
 

조재훈 편집국장
조재훈 편집국장

예부터 나라가 전란에 빠졌을 때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을 '몽진(蒙塵)'이라 했다. 원래 '머리에 먼지를 쓴다'는 뜻인데 임금이 난리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함을 비유했다. '파천(播遷)'도 같은 의미다. 몽진이나 파천은 사실 수치스럽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고려 제8대 왕이자 태조 왕건의 손자인 현종이 대표적 케이스다. 그는 나주까지 몽진 갔지만 결국은 거란의 보급로를 끊어 마지막 승리를 이끌었다. 이처럼 도망을 잘 가면 그 또한 기회가 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몽진을 무려 3번이나 하고도 끝내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왕이 있었다. 바로 조선 16대 왕 인조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그 이듬해(1624년) 이괄의 난으로 충청도 공주의 공산성으로 도망을 갔다. 첫 번째 몽진이었다. 두 번째는 1627년 정묘호란으로 강화도로 몽진한 것이고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것이 세 번째 몽진이었다. '한 번 속으면 실수고, 두 번 속으면 바보'라는 얘기가 있다. 인조 임금은 3번이나 도망치고도 끝내 뒷일을 도모하지 못한채 수모만 당했다.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닿도록 숙이는 고두(叩頭) 삼배(三拜)로 역사상 최고 굴욕의 정점만 찍은 셈이다. '최명길이 말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 최명길이 울었다. 울음을 멈추고 최명길이 또 말했다. 전하, 뒷날에 신들을 다 죽이시더라도 오늘의 일을 감당하여주소서. 전하의 크나큰 치욕으로 만백성을 품어주소서. 감당하시어 새날을 여소서.' 김훈의 '남한산성' 중에서 인조가 성을 나설 때의 한 장면이지만 인조에게는 최명길의 말조차 허공 속을 맴도는 부질없는 메아리였을 게 틀림없다.

역사는 말한다. 몸을 피했다고 '파천'인 것만은 아니다. 마음이 멀어지는 것 또한 이와 다를 바 없다. 사고와 철학, 이념의 방향이 백성과 동떨어지고 삶 자체가 백성과 융화되지 못한다면 그 또한 몽진이고, 파천이다. 역사는 그렇게 반복된다. 그리고 늘 깨어있다.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작가 김훈의 말이 구김이 없어 지금의 코로나 위기 국면에서도 가슴을 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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