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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과 왕건이 주고 받은 편지...후백제 견훤2. U울림통(68)

 고려와 수호 동맹를 맺은 신라 경애왕을 제압하고 공산성전투에서 고려에 맞서 크게 이긴 후백제 견훤은 승리에 도취해 고려의 평양 땅을 밟겠다는 도발적인 편지를 고려 왕건에게 보냈다. 이에 질세라 왕건도 답장을 보내 자신의 넓은 도량을 내보이며 견훤을 사마귀와 모기에 빗대며 그의 비뚤어진 도덕성도 꾸짖는다. 

 후백제 국서(國書)인 편지는 견훤의 책사, 파진찬(波珍飡) 최승우(崔承祐)가 썼다. 당나라 유학파인 최승우는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 최원위과 더불어 최씨 성을 가진 3명의 천재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왕건의 편지도 역시 당나라 유학파 문장가로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친 고운 최치원(崔致遠)이 썼다. 

 장창호 작가는 '견훤의 야심 2편'에서 견훤과 왕건이 주고 받은 편지 내용을 소개하며 후삼국시대 맞수였던 견훤과 왕건이 칼과 창이 아닌 붓과 먹으로 펼친 한치의 양보도 없는 또다른 열전을 실감나게 연기하고 있다. 

<견훤>
"아우 보께 신라의 제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아우를 월성으로 불러 들이려고 한 것을 알고 있네.

그건 큰 자라의 소리에 작은 자라가 소리 내는 꼴이며 종달새가 매의 날개를 찣어려고 하는 짓이니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묘 사직은 빈터가 될거야.  

내 먼저 조적(祖逖)의 채찍을 잡고 한금호(韓擒虎)에 도끼를 휘둘러 무뢰한을 타이르며 설득했는데 뜻밖에 간신들이 도망가고 경애왕은 운이 없어 눈 감으셨지.

경명왕의 외종제이며 헌강왕의 외손 김부(경순왕)를 받들어 신라 왕에 모시니 위태로운 나라 바로 세우고 없는 왕 다시 않힌 과인의 공덕.

아우는 그 마음 헤아리지 않고 이리 저리 떠다니는 말을 믿고 온갖 꾀로 왕 자리 넘겨 보고 갖은 방도로 이 땅을 짓밟으니 이 무슨 수작인가 아우는 내 말머리도 보지 못했고 내 쇠털 하나 뽑지 못해서.

초겨울 성산(星山, 경북 성주)지 나래 쌓아 신하인 색상(索湘, 고려 장수)이 그 손을 묶였고 이 달 들어 미리사(美利寺) 앞에선 아우의 좌상 김락(金樂)이 해골을 드러 냈지 이 밖에 죽인 것도 많고 쫓아가서 사로 잡은 것도 적지 않아.

강하고 약함이 이와 같은데 누가 이기고 질지는 다 알리라 내가 바라는 것은 평양의 누각에 내 활을 걸고, 패강(浿江, 대동강) 물을 내 말에게 먹이는 것이오. ..."

<왕건>
"처음엔 당신이 적을 가벼이 여겨 사마귀(螳蜋, 버마재비)가 수레바퀴를 막는 꼴로 달려드니 그게 가당치 않음 알고 내가 물러서서 모기(蚊)가 산을 짊어진 모습 이었으니까.

공손히 사과하면서 하늘에 맹세했지 그날 이후 길이 화친하겠다고 하여 서로 죽이지 않는 병가의 뜻 받들어 포위망을 풀어 군사를 쉬게 하였소. 볼모를 잡고서도 마음 편하게 대해서니.
 
내가 백제 사람에게 득을 베푼거요.

맹세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형의 포악한 힘이  발작할지 누가 알았겠소 땅벌과 전갈의 도구로 백성을 헤치고 이리와 호랑이 같이 덤벼 금성을 궁지에 몰고 신라의 궁궐을 뭉개줄 생각이나 했겠소.

주나라를 떠받든 진의 환공이나 문공 처럼 형님 그 패륜에 맞설 사람이 어디 있겠소 기회를 틈타 반역을 도모하던 한나라의 왕망(王莽)과 동탁(董卓) 처럼 간악한 자들만 남았소. ..." 

 정리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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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 보기 : 장창호TV [71] 견훤의 야심 #2

광주 북구 신가동 풍영정(風詠亭)에서 바라본 견훤대 위치로 추정되는 동림동 대마산(오른쪽)과 전경. 광주읍지에 견훤대에서 견훤이 군대를 지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인근 생룡마을에서 성터의 흔적이 나왔는데 통일신라의 토기와 기와가 출토되었다.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홈페이지 사진 출처
광주 북구 신가동 풍영정(風詠亭)에서 바라본 견훤대 위치로 추정되는 동림동 대마산(오른쪽)과 전경. 광주읍지에 견훤대에서 견훤이 군대를 지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인근 생룡마을에서 성터의 흔적이 나왔는데 통일신라의 토기와 기와가 출토되었다.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홈페이지 사진 출처

 

경북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에 있는 견훤 사당의 모습. 견훤 설화와 관련된 후백제대왕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매우 드문 현상이다. 문화재청 사진 출처
경북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에 있는 견훤 사당의 모습. 견훤 설화와 관련된 후백제대왕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매우 드문 현상이다. 문화재청 사진 출처
삼국유사 2권 제2 기이(紀異)에 기록된 후백제 견훤이 왕건에 보낸 편지 글. 규장각 본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출처
삼국유사 권2 제2기이 후백제 견훤 조에 기록된 후백제 견훤이 왕건에 보낸 편지 글. 글은 통일신라 최승우(崔承祐)가 지었다. 규장각 본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출처

昨者國相金雄廉等将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凖翼, 必使生霊塗炭宗社丘墟. 
僕是以先著祖鞭, 獨揮韓鉞誓百寮如皎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姧臣 遁逃邦君薨變. 
遂奉景明王表弟獻康王之外孫勸即尊位, 再造危邦,喪君有君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徒聽流言, 百計窺覦多方侵擾,尚不能見僕馬首拔僕牛毛. 
冬初都頭索湘束手星山陣下, 月内左將金樂曝骸羙利寺前, 殺獲居多追禽不小. 
強羸若此勝敗可知, 所期者掛弓於平壤之樓, 飯馬於浿江之水. / 한국사테이터베스트 출처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에 기록된 왕건의 후백제 견훤의 편지를 받고 보낸 답장의 글. 규장각 본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출처
삼국유사 권2 제2기이 후백제 견훤 조에 기록된 왕건이 후백제 견훤의 편지를 받고 보낸 답장의 글. 글은 통일신라 고운 최치원(崔致遠)이 지었다. 규장각 본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출처

足下始軽敵以直前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辝指天作誓, ‘今日之後永世歡和, 苟或渝盟神其殛矣.’ 
僕亦尚止戈之㱏期不殺之仁, 遂解重圍以休疲卒, 不辝質子, 但欲安民. 
此即我有大徳於南人也. 
豈期歃血未乾, 凶威復作蜂蠆之毒侵害於生民, 狼虎之狂為梗於畿甸, 金城窘忽黄屋震驚. 
仗義尊周誰似桓·文之覇, 乗間謀漢唯看莽·卓之姧. / 한국사테이터베스트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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