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 전투 크게 이긴 후백제는 강주(경남 진주)와 부곡성(경북 군위군)에서 고려를 물리치며 연전연승했으나 929년 고창(경북 안동) 전투에서 고려 유금필(庾黔弼) 장수를 만나 8,0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패전하더니 이후 전장터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운주성(충남 홍성군)전투에 패한후 기세가 걲인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넘기려 하자 맏아들 신검(神劍)과 동생 용검.양검은 불만을 품고 한밤중 부친 잠자리에 뛰어들어 견훤을 금산사(전북 김제시)에 유폐 시키고 동생 금강은 죽여 버린다.
모악산 산자락 금산사에서 견훤은 3개월 동안 노심초사 하다 935년 고려 왕건에게 귀의를 요청한다. 맹장 유금필이 수군을 끌고 나주로 내려와 견훤의 망명을 도왔다. 왕건은 견훤에게 태자 보다 높을 벼슬을 내리고 별궁인 남궁에 머물게 한다. 그리고 양주를 식읍(食邑)으로 내주며 후하게 대했다.
장장호 작가는 신라 경순왕이 귀순한 이듬해인 936년 고려에 귀의한 견훤이 왕건에게 후백제 정벌을 논의하는 상황을 연기한다. 이후 일리천(경북 구미시)전투에서 기마병 1만명을 직접 거느린 견훤이 고려군 선봉에 서자 건국 군주이자 상왕인 견훤의 모습을 바라본 후백제 장수들은 간장이 서늘해졌다. 후백제는 끝내 분열하며 무너진다. 견훤도 자신의 손으로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 등창이 생겨 황산(논산)의 절에서 숨졌다. 정리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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