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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3월 처음 등대 불을 밝힌 울기등대는 애초에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던 일본이 러시아 발틱함대 항로를 감시키 위해 지은 군사용 등간(燈竿)이 출발점이다. 등대 주변 소나무들이 자라면서 등탑 역할을 할수 없게 되자 구 등탑 옆에 1987년 12월 새로운 울기등대가 세웠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동구 대왕암공원 내 울기(蔚岐)등대는 건립 100주년을 맞아 2006년 4월 '울산의 끝'이라는 뜻에서 '울산의 새로운 기운을 염원한다 '라는 뜻을 지닌 울기(蔚氣)등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진은 울기등대의 구 등탑(앞)과 신 등탑의 모습. 2021. 8. 31 김동균기자 justgo999@ 

눅진한 달력 한 장을 뜯자 가을이 왔다. 귀뚜라미, 철써기, 여치들의 중창이 드높아져도 변화무상한 자연은 달력의 찰나처럼 순탄치 않다. 올가을의 첫날은 비와 바람의 탱고로 어지러웠다. 속수무책의 관객인 나는 춤을 추지 못한다. 밀롱가를 배워 남미로 카페리호 여행을 꿈꾸는 친구, 조의 실력은 얼마나 늘었을까. 정오를 넘어서자 신나던 춤곡이 늘어진다. 오늘은 문무대왕의 기운이 든 울산 끝자락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 근대의 역사가 된 등대가 있다.  

땡볕을 무릅쓰고 한 달 전에도 다니러 온 곳. 대형 마스크를 끼고 입을 다문 미르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없다. 빨간 공중전화기가 그만큼이나 붉은 칸나정원에서 오랫동안 잊은 이름을 불러낸다. 동전 하나 집어넣어 철커덕, 그리운 이의 액정에 낯선 전화번호를 띄워놓고 싶다. 하지만 그 번호는 잊은 지 오래. 등대와 출렁다리의 갈림길에 선 사람들, 열에 아홉이 출렁출렁 다리 쪽으로 간다. 가을의 전령사 수크령이 한들거린다. 맥문동은 모든 보라를 내려놓았다. 여름빛으로 막 피어난 꽃무릇은 위풍당당한 문무왕 행차의 근위병 같다.

지난 7월 개통한 국내서 가장 긴 303m 출렁다리는 인기몰이를 하며 대왕암공원의 새로운 명소가 되고 있다. 2020. 9 김려원
지난 7월 개통한 국내서 가장 긴 303m 출렁다리는 인기몰이를 하며 대왕암공원의 새로운 명소가 되고 있다. 2021. 9 김려원

매표소에 가니 입장을 할 수 없다. 강풍과 미끄럼 때문이라니 섭섭해도 어쩌랴.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는 출렁다리를 눈앞에 두고 돌아서려니 웬걸, 입장을 허락하는 문지기님. 두근거리는 숨을 누르며 출렁다리에 발을 디뎠다. 뾰족구두나 빠질 만한 촘촘한 철구조물에 안심하면서도 지지대가 없는 저 먼 거리가 아득하다. 순간 최대풍속 10.7m/s의 강풍주의보가 발효된 날이지만 나는 보기보다 싱겁게 건넜다. 포항에서 왔다는 한 무리의 사람을 보니 조선업 불황으로 10여 년 침울한 울산 동구에 관광 호황기가 올 모양이다. 왼쪽으로는 일산진해수욕장, 색색의 등부표, 바위섬에 들이치는 물결, 비구름을 떨군 잠깐의 햇발이 쾌청하다.

해변 산책길인 전설바윗길을 걸었다. 찰나를 이어가는 우리는 연중 한 번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며 짧은 하루를 보낸다. 얼마 전 나도 그 하루를 지나왔다. 수루방, 용굴과 민섬, 넙디기, 남근암과 탕건암, 고이, 사근방…. 저 바위들은 언제쯤 태어나서 늙지도 않는 철썩임을 전해 오는가. 바위들의 황톳빛 전설과 설화에 귀를 대고 걷는데, 울기등대로 가는 이정표가 송림 사이로 길을 내어준다. 담장 너머로 나타난 두 기의 등대. 활짝 열린 문. 후문으로 들어서자 늘씬한 각선미의 촛대등대가 팔을 붙든다.

저항할 수 없는 이끌림에 돌아다보니, 왕자를 기다린 라푼첼이 꼭대기의 작은 창에서 긴 머리칼을 늘어뜨리려다 사라져버린다. "라푼첼, 난 마법사가 아니야. 머리칼을 내려줘. 내가 꺼내줄게." 어이쿠!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래서야 원. 라푼첼에게 팽을 당해도 슬퍼할 처지가 아니다. 한자리에서 백 년 넘게 바다만 봐온 울기등대의 등탑도 만나야 한다.

탐방 시간이 18시까지라 발길을 재촉했다. 무신호기 전시관의 흐린 창이 눈길을 붙든다. 작동을 멈춘 설비들, 희디흰 침묵에 빠져든 지붕의 커다란 나팔이 더께를 둘러쓰고 있다. 안개나 비, 눈으로 인해 시계가 나쁠 때는 불빛 대신 소리로 위치를 알려주던 에어 사이렌(압축공기로 경적을 울리는 장치)인 무신호기. 1958년부터 54년간 운영했는데 곧 등대박물관에 기증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의 신등탑 무신호기는 전기혼(전기로 발음기를 울려 위치를 알리는 장치)으로 소리를 내보낸다. 촛대등대 곁에서 동남서 삼면 바다를 향해 각 4기씩, 12기의 나팔에서 40초에 한 번씩. 대왕암 전설 일부를 새겨둔 낮은 언덕길 끝에서 만난 울기등대의 구등탑은 희고 아담한 2층집이다. 포치(porch)라 불리는 돌출된 출입구와 격자창이 아기자기하다. 등댓불이 꺼지던 날까지, 그 이후로도 날마다 받아적은 백 년간의 고독이 저 작은 몸체에 빈틈없이 배였으리라. 출입문을 닫아건 까닭은 차마 꺼내고 싶지 않은 내력이 있어서일까. 불이 켜지지 않는 전망대에 올라 그 사연 하나쯤은 토닥토닥 만져주고 싶다.

동구 대왕암공원 내 울기(蔚岐)등대는 건립 100주년을 맞아 2006년 4월 '울산의 끝'이라는 뜻에서 '울산의 새로운 기운을 염원한다 '라는 뜻을 지닌 울기(蔚氣)등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김동균기자 justgo999@
1906년 3월 처음 등대 불을 밝힌 울기등대는 러일전쟁 때 러시아 발틱함대의 항로를 감시키 위해 일본군이 지은 군사용 등간(燈竿)이 출발점이다. 등대 주변 소나무들이 자라면서 등탑 역할을 할수 없게 되자 구 등탑(사진 왼쪽) 옆에 1987년 12월 새로운 울기등대를 세웠다. 2021. 6. 27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이렇게 하얗고 예쁘장한데 이 등대가 세워진 배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러일전쟁이 그 시초입니다. 한반도와 만주 지배권을 놓고 일본군이 동남해안 곳곳에 목재 등간(燈竿)을 세워 해상권을 거머쥐려 했지요. 등간은 길쭉한 나무기둥에 매단 석유등을 도르래로 오르내리게 하는 구조였다네요. 울기등간은 1905년 2월쯤에 설치했고요. 등댓불 점화는 1906년 3월 26일에 6미터 높이의 돔형건물에서 했습니다. 1910년에 등간을 철거해 흰 콘크리트 팔각 구조물로 바꿨고, 1972년에 3미터를 증축한 뒤로는 그대롭니다. 소나무가 등댓불을 가리자 1987년에 새로 등탑을 세운 거죠. 33.3킬로미터 해상까지 1초 간격으로 빛을 내보내는 고단함을 아는지 저 소나무들이 팔순 맞은 구등탑에게 '쉼'을 선물한 듯해요. 구등탑은 구한말 건축양식을 보존하고 있어 해양수산부 등대문화유산 제9호 및 등록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됐고요, 올 1월에는'이달의 등대'로 뽑혔답니다." 우도등대와 간절곶등대를 거쳐 올해부터 울기등대 지킴이로 근무한다는 울기항로표지관리소 직원에게서 구등탑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왕암 쪽에서 파도 소리를 싣고 해풍이 밀려온다.

"저흰 등댓불이 켜져야 마음이 편안해요. 매일 대여섯 번은 불빛을 확인합니다. 날씨는 늘 살펴야 하고요. 등명기는 열십자 방향으로 빛을 내면서 360도 회전하지만 멀리 있는 선박에선 한 번 깜빡하는 걸로 보여요, 방파제 등댓불의 깜빡임처럼. 신등탑 등명기는 10초에 한 번씩 4면을 돌며 48킬로미터 해상까지 빛을 보냅니다. 한 면엔 검은 커튼을 쳐서 마을 쪽 불빛은 차단해주고 있어요. 바다를 지키는 만큼 주민들의 생활도 보호해야 하니까요. 빛이 그렇게 멀리 나가는 이유는, 무지개가 빛을 모으는 것처럼 프리즘 렌즈가 빛을 보내기 때문이죠. 주변 불빛과의 혼동을 피하려고 750와트나 되는 강한 빛을 더 높은 곳에서 내보냅니다."

동구 대왕암공원의 누런 황금빛 기암절벽의 모습. 김동균기자
동구 대왕암공원의 황금빛 기암절벽. 2021. 7. 4 김동균기자

신등탑은 안전하게 먼 거리를 비추라는 염원을 담은, 높이가 24미터이지만 산 높이를 포함하면 52미터란다. 해상에서 16킬로미터 간격인 울기등대와 간절곶등대는, 백 년을 마주보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하루하루의 사연을 밤새 불빛으로 타전한다고. 출렁다리가 생겨나서 등대의 인기도 높아지지 않았냐는 물음에는 오히려 줄었다고 대답하신다. 내가 출렁다리를 거처 등대를 방문한 것같이 다들 나가면서 둘러보는 격이다. 통나무의자에 멍하니 앉은 노인과, 바다에 뛰어들 것만 같은 청새치 조형물, 자물쇠가 채워진 전시체험공간, 숙소동을 둘러싼 대나무, 트릭등대 곁에서 늙어가는 일백 살의 조형 소나무, 스탬프를 찍어주는 등대여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문 닫을 시간이다. 서둘러 정문으로 향하려는데 깜빡 잊었다며 그가 전하는 마지막 소절.

김려원 시인· 2017년 진주가을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이메일: climbkbs@hanmail.net
김려원 시인
2017년 진주가을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climbkbs@hanmail.net

"울기 이야기를 빠뜨렸네요. '울기(蔚埼)'는 일본군이 지은 울기등간에서 딴 이름입니다. '울산의 끝'이라는 뜻이죠. 일본식 명칭이라는 여론이 있어 울기등대 100주년(2006년) 기념식 때 '울기(蔚氣 : 울산의 기운)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한 직원이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등대 쪽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난다. 아하, 라푼첼과 왕자가 촛대등대 꼭대기 창을 탈출해 포치 안으로 들어선다. 촛대등대의 출입문은 열린 적이 없으니 이 도리밖에 없는 게지. 둘은 이제 달콤한 속삭임을 노래하겠다. 창가에 선 나는 발이 안 떨어진다. 정문 쪽에서 직원이 그만 나오라는 손짓을 한다.

어쩌랴, 소나무숲 가득 번져나는 연인의 방실거림에 손 흔들어주곤 대왕암길을 걷는다. 공원의 자랑거리인 일만오천 그루 소나무를 일본해군이 조성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소나무도 등대도 그 오랜 고단함을, 보이지 않는 나이테에 단단히 새겼으리니.    

대왕암에 이르는 길은 바닷바람에 온몸을 내어주는 일이다. 천삼백 년이 지나도록 동해를 지키는 호국룡을 바닷바람 휘몰아치는 기운으로 만나는 일이다. 짙푸른 바다가 용의 움직임으로 일렁일 때 당신은 만파식적 소리를 들으시는가. 코와 입에는 마스크를, 눈에는 2미터 거리 두기 글자를 새긴 요즘의 당신. 그나마 온전히 열린 두 귀에 만만파파식적 소리가 들려오시는가. 먼바다를 응시하는 내 눈을 머리카락이 찌른다. 등대 쪽으로 눈을 돌려 먹구름이 가둔 노을빛을 그려본다. 초가을 볕이 저물 때 저 대왕암의 붉은 놀을 볼 수 없다니. 내려가는 계단에서 마주친 당신을 비켜서는 내 등을 바닷바람이 민다. 후두후둑 신발에 빗방울이 듣는다. 일산진해수욕장 모래밭에 비를 맞으며 섰다. 오색불빛 영롱한 출렁다리의 야경을 바라보다 사람 뜸해진 틈에 마스크를 벗었다. 오색불빛을 빨아들이는 코! 수평선까지 환해지는 시야! 출렁다리 너머에서 먼바다로 떠나는 이 밤의 전기혼 소리, 그리고 따듯한 등댓불. 딸깍, 밤새 깊은 바다를 비춘 울기 등댓불이 꺼지면 또다시 그 불빛을 잉태한 한반도의 첫 태양이 뜨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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