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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향 시인
심수향 시인

살다보면 무릎 칠 정도의 감탄하는 일을 겪을 때가 있다. 선조들이 남긴 속담이나 동서양의 금언 격언 같은 것에 맞춤처럼 들어맞는 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는 뜻이다. 이번에 그런 속담 하나가 기막히게 들어맞는 일을 겪었다.

내게는 고향 친구 네 명이 만나는 작은 모임이 하나 있다. 그간 제 살림 일구느라 만나지 못하다가 십 수 년 전부터 갖게 된 모임이다. 처음 만났을 때 한 친구는 붓글씨에 매진하여 지역의 셀럽인사가 되어 있었고, 두 친구는 살림 9단이라는 흔한 것 같지만 쉽지 않은 별명을 헌사했을 정도로 똑 부러지는 살림꾼으로 살고 있었다. 거기에 무명 시인인 나 이렇게 네 명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밥도 먹고, 전시회도 가고, 가벼운 나들이도 하며 산 지가 십 수 년 되었다. 몇 번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국내여행도 시간 날 때마다 다니면서 돈독하게 우정을 쌓아왔다.

그게 뭐 대수냐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사실 이 정도는 우리 연배에선 지극히 상식적인 모임이기 때문이다.

이 모임이 특별하게 된 것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말 한 마디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작품 전시회를 다녀온 후 나눈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도 감상하러만 다니지 말고 감상시킬 뭔가를 획책해보자는 한 친구의 말에 모두 좋다고 찬성한 것이 그 계기다. 나는 뭘 배우지? 민화를 배울까? 사진을 배울까? 켈리를 배울까? 장난기 다분하게 수다를 떨었다. 그러고는 만날 때마다 공부 잘 하고 있겠지? 하고 장난치는 말을 서로 던지며 웃곤 했었다.

그 농담이 진담이 되고 있다는 걸 안건 그 뒤 몇 년 지난 이번 여름이다.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물 가지러 가는 걸음에 한 친구의 전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친구는 그간 조용조용 민화를 공부하고 있었고, 그 모임 전시회에 친구가 처녀출품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끝낸 친구가 돌아오자 다그쳐 전시 일정을 물었고 전시회에 갔다. 친구의 작품은 내 눈엔 단연 최고였다. 수년 텃밭 가꾸기에 푹 빠져 살고 있던 친구가 어느새 저리 섬세한 선이며 색을 만들어내고 있었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참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또 한 친구는 얼마 전 알프스 자락 같은 가지산을 넘어 밀양으로 이사 갔다. 코로나를 빙자해서 방문하지 못하다 이번 여름 밀양을 지나는 걸음에 불쑥 들르게 되었다. 집 구경하러 어슬렁거리다 한 방 앞에서 발걸음이 붙들리고 말았다. 그 방 벽에는 켈리그라피를 연습한 화선지가 수십 장 여기저기 걸려 있었고, 가벼운 삽화까지 보였다. 한쪽 책상 위에는 전문가 분위기가 다분한 도구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온몸에 전율이 자르르 지나갔다. 젊은 날 전통붓글씨를 공부한 경력 덕인가 예사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최소한 내 눈에는 어쭙잖은 전문가보다 월등한 솜씨 같아 보였다.

나는 두 친구가 이번 여름 내게 준 충격에 깊이 빠진 채 가지산을 넘었다. 그 충격은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과연 나는 저 친구들처럼 깊이 열중해서 무언가 이뤄낸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더듬어 봐도 제대로 이룬 것 없는 빈손이다. 친구들의 아름다운 도전과 용기 앞에 시인이라는 이름 하나 걸어놓고 십 수 년을 답보 상태로 걸어온 내가 한없이 부끄러웠다. 죽비로 제대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샌 줄 모른다더니 두 친구는 그 찌는 더위에도 멈춤이 없었고, 힘닿는 데까지 노력해보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사실 나이 들어서 무언가에 도전할 때는 세상에 이름 석 자 내걸기 위함도 아니고, 큰 명예를 바라서도 아니고, 도전 분야의 최고 경지에 이르러 보겠다는 의지도 아니다. 물론 사람마다 추구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삶에 대한 동력을 다시 얻는 것이 가장 큰 것이고, 그것이 주는 자긍심과 자존감 회복이 그 다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친구는 젊은 날 들었던 붓과 나이 들어 다시 잡은 붓은 그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한다. 

자칫 노년이 주는 무력감과 우울로 채워지던 시간이 새로운 도전으로 즐겁게 익어가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붓을 잡고 있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그 어떤 잡생각도 들지 않아서 너무 좋다고 말한다. 무아의 경지가 이런 것 아닐까 싶다. 몰입하여 아름다운 세상에 빠지는 것 그것만큼 소중한 시간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게다가 내 가장 가까이에 변함없고 배신하지 않고 아름답기까지 한 진정한 친구를 두었으니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날 샌 줄도 모르고 빠져 있는 늦게 배운 도둑 두 친구에게 축하와 박수를 한껏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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