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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
송은숙 시인

중고마켓에 화초장 매물이 올라왔다. 40여 년 전에 재벌가에서나 살 수 있던 고급 가구였다고 소개된 화초장은 문갑까지 곁들여 그때보다 4배 가까운 금액으로 값이 매겨졌다. 물가상승을 감안했겠지만 좋은 것은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유지되거나 더 올라간다. 색색의 옥돌을 정교하게 깎아 화조나 과일 문양을 만들어 붙인 화초장은 40년 세월이 무색하게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놀부가 부자가 된 흥부한테서 괜히 화초장을 탐낸 것이 아니었다.

"고초장, 된장, 간장, 뗏장, 아이고 아니로구나. 초장화, 초장화, 초장화, 장화초, 장화초 아이고, 이것도 아니로구나. 이것이 무엇일까? 방장, 천장, 송장, 접장, 아이고 이것도 아니로구나. 이것이 무엇일까? 갑갑하여 못살겠네." 화초장을 빼앗아 신이 난 나머지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던 놀부는 도랑 하나를 건너다 그만 그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고추장, 된장, 간장 하면서 장자가 들어간 온갖 이름을 다 불러보는 장면이다. 화초장은 문판에 꽃 그림을 그려 장식하고 안에는 해충의 침입을 막으려고 한지나 비단을 발라 만든 전통장이다. 목질이 가볍고 무늿결이 아름다운 오동나무로 만들고 화초무늬가 정교하고 화려해 부잣집 규방을 장식하던 고급 가구이다. 

이런 멋들어진 화초장은 아니지만 친정에는 열두 자 자개장이 두 개 있었다. 오빠 방에 있는 것은 올케가 시집올 때 해 온 것이고, 안방에 있던 자개장은 나중에 새집을 지은 뒤 오래된 서랍장과 나무 장롱을 버리고 들인 것이다. 그때 엄마가 신이 나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리 놔라 저리 놔라 하며 일꾼을 부리던 일이 기억난다. 안방의 것은 십장생을 소재로 한 것으로 전복껍데기를 정교하게 오려 붙여 사슴, 소나무, 대나무, 불로초 등을 만들었고, 오빠 방의 장롱은 산속의 물가에 띠집이 있고 천도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려 은둔 거사의 한가로운 생활을 표현한 것이다. 40년 가까이 된 장롱이지만 자개의 무늬는 여전히 영롱하고 찬란했다. 

여름이면 앞뒷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 두고 자개장 앞에 펼쳐진 돗자리에서 뒹굴거리고, 겨울엔 두터운 솜이불 속에 들어가 귤을 까먹으며 만화책을 보던 생각이 난다. 자개장은 늘 윤이 나게 닦여있어서 어둠 속에서도 희부윰한 빛을 냈다. 자개장에 박힌 달과 소나무와 사슴 등을 보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날에는 가끔씩 기이한 꽃이 피거나 이름 모를 새가 노래하는 산속의 소로를 따라 걷는 꿈을 꾸었다. 

자개를 박아 만든 가구를 나전칠기라고 하는데 이것은 나전과 칠기의 두 가지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바탕이 되는 칠기는 옻칠을 말하는 것으로 옻나무를 뜨거운 물에 쪄서 옻을 추출하여 가구에 칠한다. 옻칠을 거듭하여 검은빛이 나면 니스 칠을 하여 광택을 더했다. 옻은 방충과 방습이 탁월해 오래돼도 벌레를 먹거나 틀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옻을 추출하고 바르는 일은 만만찮은 공정이다. 아무리 옻을 안 탄다 해도 다량의 옻나무를 만지다 보면 수차례 옻 독에 오른다고 한다. 나전 분야는 어떤가. 광택 있는 조개껍데기를 정교하게 오려내고 다듬은 뒤 부레풀로 일일이 붙여야 해서 역시 눈을 혹사하고 등을 굽게 하는 고된 일이다. 

이렇게 공이 많이 드니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어서 선뜻 자개장을 들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사실 그 무늬와 색깔이 '모던'하지 않은지라 요즘 사람들은 잘 찾지도 않는다. 이른바 전통 공예품이 가진 딜레마랄까. 그래서 장롱이나 문갑 같은 가구는 주문 제작으로 넘어가고, 보석함이나 필갑 같은 소품들이 주로 쇼핑몰에 나와 있는 편이다.

엄마의 자개장은 오래도록 안방을 지키고, 요양병원에 계신 삼 년 동안 빈방을 지키다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유품을 정리할 때 오히려 돈을 주고 실어 보냈다. 그럴 수 있다면 우리 집으로 가져오면 좋았겠지만 비좁은 아파트에 놓을 자리가 없었다. 자개장과 아울러 두꺼운 솜이불도 가져오고 싶었지만 역시 무리였다. 짐을 정리하고 고물상을 불렀다. 고물상은 가벼운 캐시밀론 이불은 가져가고 순수 국산 솜으로 만든 솜이불은 쓸 데가 없다고 그냥 두고 갔다. 아, 자개장뿐 아니라 자개장을 가득 채웠던 추억이 깃든 이불 등속도 그저 한낱 짐짝이 돼버렸다. 이사 철이면 아파트 단지 안에도 오래된 자개장이 버려진 것이 보인다. 자개장을 아끼던 세대는 가고 장롱은 이케아 같은 조립장이나 붙박이장, 아예 명품 가구로 넘어가고 있다. 벼르고 별러 장만하던 자개장이 이젠 돈을 주고 버려야 할 애물단지가 된 것이다

엄마의 자개장이 실려 간 얼마 뒤 친정집이 팔리고, 올케의 자개장마저 어디론가 실려 갔다. 그렇게 우리 손을 떠나고 잊혔던 자개장이 화초장 판매 글을 보니 새롭게 되살아난 것이다. 골동품점이나 고가구점이 아닌 대중들이 보는 중고마켓에 올려졌으니 화초장의 매력을 아는 새 주인을 만나 안락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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