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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화 소설가
정정화 소설가

아침 이슬이 내린 둑길을 걷는다. 함초롬히 젖은 풀꽃, 고개 숙인 강아지풀, 영글어가는 벼가 맑은 기운을 뿜어낸다. 햇살이 이슬 위로 내려앉으며 색을 입힌다. 핸드폰 카메라에 몇 장의 풍경을 담는다. 반환점을 돌아 나와 논의 사잇길로 지나가는 중이었다.

"휴대폰 있지요? 지금 몇 신교?"

노란 고무장화를 신고 약통을 짊어진 아주머니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나이가 예순 언저리쯤 돼 보였다.

"여섯 시 사십사 분이에요"

지퍼 달린 주머니에 들어 있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알려줬다. 아주머니는 구릿빛으로 탄 민낯인 채였다. 아주머니는 내 대답에 고맙다거나 웃거나 하지 않고 무심한 얼굴로 멀어져갔다. 바쁜 일이 있는 듯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주머니의 얼굴을 어디선가 본 듯했다. 어디서 봤더라, 기억을 더듬어봤다.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우측으로 기역자로 꺾인 논두렁이 보였다. 순간 봄날의 들녘이 펼쳐졌다. 그날도 이 길을 걸었다. 사잇길이라 걸을 때도 있고, 지나치기도 하는 곳이다. 넓은 논에 아주머니 혼자서 모를 심고 있었다. 기계가 지나가고 난 빈자리를 메우는 일이었다. 친정이 논농사를 지어서 나도 모내기를 하며 자랐고, 아주머니가 하는 것과 같은, 손모 심는 일을 몇 년 전까지 도와줬다. 지금 친정에서는 기계모만 심는다. 무심코 아줌마 곁을 지나는 길이었다.

"저기 모 좀 갖다주이소"

모는 제법 떨어진 논의 입구 쪽에 놓여 있었다. 다른 동네 사람이고 아는 얼굴이 아니었지만, 오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툭 던지듯 말했다. 요즘은 모를 모판에 키운다지만, 그래도 떼어낸 모에는 흙탕물이 흐른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아닌, 길을 걷는 타인에게 부탁하는 건, 그것도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아주머니는 무심한 얼굴로, 당연히 갖다주겠거니 하는 얼굴로 말하고는 논바닥에 코를 박고 모를 심었다.

"이거 뭐하러 꽂습니까? 곡식 얼마 나지도 않는데 힘들게……"
"논두렁 밑에 풀이 많아서 겸사겸사 함더"

허리를 숙이는 아주머니의 몸이 무거워 보인다. 모는 넓은 논을 지나 그다음 논의 논두렁 입구에 있었다. 나는 모판 하나를 들고 아주머니에게로 갔다. 아주머니 가까이에 모판을 두고 돌아서 나오는데 아주머니는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일만 열심히 했다. 뭔가 들어야 할 말을 못 들은 사람처럼 나는 잠시 주변을 서성거렸다. 결국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엎드려서 논두렁 밑의 잡초를 뽑으면서 모를 심는 아주머니를 뒤로하고 다시 걸었다. 평소라면 처음 모판이 있던 위치보다 조금 더 들어간 곳까지 걷지만, 그날은 모판을 갖다주고는 그대로 사잇길을 빠져나왔다.

무심한 아주머니의 행동이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농사짓는 사람이라는 것과 나와 남을 구분 짓지 않는 아주머니의 자연스러운 행동 때문인 듯했다. 어쩌면 우리는 가면을 쓴 얼굴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그것이 '처세 잘한다'로 통하기도 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일을 시킨다거나 시간을 묻고 고맙다고 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예의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고단한 아주머니의 삶에서 격식을 따지는 말은 필요치 않은 듯했다.

어릴 적 앞집에서 밥이 없으면 우리 집에 밥을 한 그릇 얻으러 오기도 하고, 없는 농기구를 빌리러 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엄마는 밥을 기꺼이 나누고, 농기구를 빌려줬다. 형식상은 밥을 빌리러 오는 거지만, 갚는 법도 없다. 먹거리를 나누는 등 다른 방식으로 인정을 나눴던 걸로 기억한다.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농기구를 가져다 쓰고 갖다 놓곤 했다. 언제부턴가 나와 남이 구분되고, 지금은 주인 없는 집에 물건을 함부로 갖다 쓰면 도둑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예의 바르고 가면을 쓴 말은 화려하지만 정이 없다. 아주머니의 허물없는 말에는 어쩐지 정이 흐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덕분에 어릴 적 이웃과 더불어 내 것, 네 것의 경계가 따로 없던 시절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계기가 됐다. 나도 개인 공간을 좋아하는 편이고 타인으로부터 불쑥 사생활이 침해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허물없이 지냈던 그 시절이 아련히 그리워졌다.

세상을 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민낯의 말을 불편해하고 가면의 말을 당연시하게 됐다. 오늘은 구릿빛 얼굴의 담담한 아주머니의 민낯이, 격의 없는 말이 오래된 고향 집을 보는 것처럼 푸근했다. 때론 가면을 벗고 민낯으로 말하자. 그러면 따뜻한 온기가 들판에 퍼지는 햇살처럼 번져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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