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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순옥 플로리스트·시낭송가
윤순옥 플로리스트·시낭송가

새벽 다섯 시를 알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잠시의 뒤척거림도 없이 일어나 곧장 욕실을 향한다. 낮게 깔린 어둠이 서서히 걷힌 마당을 여명이 채우고 있다. 부드러운 온수로 몸을 적시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새벽 샤워의 쾌적함은 기억을 4년 전으로 되돌린다. 

시낭송을 시작하고 8개월쯤 되었을까. 그날도 새벽 샤워를 했다. 난생처음 시낭송대회에 참여하는 날이었다. 겨우 걸음마를 시작하는 단계인데 예선을 통과하고 대회 본선에 오른 자신이 스스로도 대견했다. 무엇보다 무료하기 쉬운 오십 중반을 새로운 도전으로 열게 된 것이 뿌듯했다. 도전을 위한 새벽을 열고 있다는 사실에 물을 맞는 마음이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20대처럼 싱그러웠다. 

코로나19가 발목을 묶어 놓기 전에는 일 년에 100여 차례의 시낭송대회가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시 낭송을 배우는 사람들은 각종 시낭송대회에 출전하여 실력을 겨루는데 상위 입상자에게는 시낭송가증이 주어진다. 민간대회에서 주어지는 증서지만 시낭송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치 있는 자격증이다. 나 역시 그 해 시낭송가증을 받는 것을 목표로 대회 개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각종 대회에 적극적으로 출전했다. 자동차로 가깝게는 두 시간, 멀게는 4시간이 걸리는 대회가 대부분이었다. 서울서 치러지는 대회는 KTX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도전에 대한 열정에 전국을 돌아보는 재미도 꽤 쏠쏠했다. 

토요일은 구미, 일요일은 영동에서 열린 대회에는 남편과 동행했다. 낭송 연습을 하면서 오가는 길은 색다른 여행처럼 느껴졌다. 어느 가을날 문경에서 치러진 대회는 여동생과 함께 했다. 펜션에 숙소를 정해 놓고 즐긴 시낭송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 해, 상위 입상자에게 주어지는 시낭송가증은 결국 받지 못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과 전국 곳곳을 여행하면서 감성을 되찾은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간절함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다양한 시들을 부지런히 읽었다. 흐름에 따라 시들을 분석하면서 시인의 마음을 헤아렸다. 과장된 감정을 얹기보다 자연스러움을 택했다. 그런 노력 덕분일까. 이듬해 문경에서 치러진 대회에서 시낭송가증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주에서 치러진 대회에서는 대상 수상과 함께 시낭송가증을 거머쥐었다. 그때의 기쁨이라니.

4년 전 그날처럼 가슴 부푼 것은 또 하나의 도전 덕분이다. 원주에 있는 박경리문학공원에서 열리는 박경리소설 입체낭독대회 본선에 참가하는 날인 까닭이었다. 얼마 전 새로이 낭독공부를 시작했다. 이름도 거창한 오디오북 나레이터 자격증 과정이다. 기초반, 심화반, 전문가반으로 교육은 단계적이다. 모든 과정을 끝내고 치르는 시험에 합격하면 오디오북 나레이터 자격증을 얻게 된다. 민간에서 받는 자격증이지만 최근 오디오북 시장의 성장을 보면 필요성이 느껴진다. 반드시 자격증을 얻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수강생 대부분이 시낭송을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이라 시낭송에서 낭독으로 범위를 넓힌 것이 더 맞는 표현이다. 

사람은 사회적동물이라 자신이 어느 한 집단에 속해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 이번 낭독대회 응모도 낭독수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수업과정에 낭독극발표가 있었는데 거기서 몇 사람을 선발하고 팀을 만들어 낭독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그동안 시낭송대회 경험은 많았지만 낭독대회는 처음이라 설레고 떨렸다. 더군다나 입체낭독대회라 퍼포먼스나 연극적 요소가 가미되어야 했다. 다행히 우리를 가르치는 강사들이 전문 성우와 시극공연 연출전문가였고 연극배우였다. 혼자서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시스템이 만들어진 상황에서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우리 팀원은 모두 다섯 명인데 시낭송을 함께 하는 도반들이다. 추구하는 것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니 같은 일을 하더라도 시너지 효과가 생기는 것 같았다. 덕분에 더욱 좋은 결과물을 얻게 되고 서로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졌다.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는 늘 가슴을 뛰게 한다. 낭독대회도 마찬가지였다. 대회장에 도착해 보니 다른 두 팀은 모두 대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도 모두 연극영화과 학생들이었다. 우리들의 아들딸보다도 어린 학생들이 경쟁자들이었다. 경쟁자들이라기보다는 그저 예쁘고 사랑스런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등장에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그런 모습도 신기했다. 그들도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퍼포먼스와 연극을 가미한 낭독극을 한다는 사실을 신기해 했다. 그들의 눈빛은 우리들이 멋지게 나이 듦을 인정하고 있어서 뿌듯하기도 했다. 

대회장에 일찍 도착한 것은 리허설을 위해서였다. 각 팀마다 돌아가며 리허설을 했는데 조금씩 주눅도 들었다. 두 팀 모두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순발력과 참신한 연출력을 갖추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연기력은 과연 연극영화과 학생다웠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그들에게 없는 연륜이라는 무기가 있다며 서로를 다독였다. 무엇보다 그들을 '상대팀'이 아닌 '멋진 젊은이'로 바라보고 응원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응하자는 말로 낙방했을 때의 실망감을 미리 위로했다. 또 어떤 상을 받든 밑질 것이 없었다. 젊은이들과 견주는 무대에 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을 비우니 비워진 자리에 행복이 들어앉았다.

우리는 최우수상을 받았다. 숱한 연습의 나날들과 설쳤던 새벽잠이 큰 보상으로 되돌아 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새벽의 깨우며 느꼈던 희열, 도전하고 성취하는 쾌감, 낯선 도시 여기저기를 여행처럼 다니며 얻은 정신적 자유와 성장. 

삶이 대단한 무엇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가슴 벌렁거리는 일들이 이어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자유와 성장의 달콤한 맛은 이미 알아버렸다. 초로의 나이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도전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이 듦이 두렵지 않고 기대된다. 지금보다 더 멋질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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