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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항을 오가는 선박들을 지켜주는 울주군 서생면 나사 등대는 밤 바다를 밝히는 등명기의 지붕이 없다.  김동균 기자 justgo999@ulsanpress.ne
울산항을 오가는 선박들을 지켜주는 울주군 서생면 나사 등대는 밤 바다를 밝히는 등명기의 지붕이 없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여우비가 올 거라는 기상예보가 현관을 나서는 순간 어긋난다. 아니다, 꼭 들어맞는다. 오늘은 여고 친구들과 나들이하는 날. 시집간 '여우(女友)'들이 한 무리 짓기로 진즉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목적지는 물 반 고기 반이라 지인망어업이 발달했다는 나사리 바다, 그리고 발갛고 하얀 등대다. 꼬리 다섯씩 달고 나름 한 재주를 헹헹 부리는 완희, 정옥, 해윤을 가는 길에 태우고 남으로 달린다. '돌아가고파 사랑하고파/ 아아 우리는 여고 졸업'생'/ (중략)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이이이이이…' 서생면 나사리는 이제 우리의 방갈로다!
  하필이면 남편도 아닌 와이퍼가 말썽이다. 창밖에선 비를 훑어내리는 뻑뻑 소리, 차 안은 친구들의 즐거운 수다로 자욱하다. 입김으로 뿌예진 차창.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여자 사람과 차량 물품이 내는 비요일의 소리극. 시간이 저절로 가듯 차바퀴가 저를 굴리고 굴려 해안에다 우리를 데려다준다. 전봇대 곁에 '미역, 다시마, 멸치 특산물 나사마을' 이정표가 나사 바다의 해산물을 미리 널어놓았다. 바다를 적시는 빗방울, 포구에 널린 어망과 뱃줄, 설렁설렁 쉬고 있는 어선에서 갯내가 후끈하다. 비의 소나타를 들으며 우리는 등대를 품은 방파제를 찰방찰방 걷는다. 하늘색 천 책가방을 안고 소나기 오는 하굣길을 냅다 뛰던 교복 치마들의 깔깔거림까지 신발에서 튕겨 오른다. 방파제 곁에는 스무 척이 넘는 어선이 하늘과 바다의 물소리에 온 귀를 열고 일렁인다. 비닐 포장이 드리워진 갯가 주막에서 어부들이 단풍나무처럼 얼큰해지고 있을 시간.

나사 등대앞에 우뚝 선 장군바위는 포구를 오가는 어선들을 지켜 보는듯 하다. 김동균 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나사 등대앞에 우뚝 선 장군바위는 포구를 오가는 어선들을 지켜 보는듯 하다. 김동균 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여고 동창들과 떠난 빗속의 나사리
붉고 둥근 몸체에 굳게 닫아건 나무문으로 손님을 맞는 나사항방사제등대. 2006년 11월부터 몸체만큼이나 열띤 불빛으로 밤바다의 뱃길을 밝혀 왔다. 항만의 입지조건이 좋은 나사리는 1970년까지 멸치잡이가 주종이었다. 호황기는 저물었어도 여전히 바다의 삶을 이어가는 어민들의 귀착지에서 등대는 15세 소년이 되었다. 빨간 윗옷을 입고 온 친구가 등대 앞 사진에서 인생샷을 건졌다며 점심을 사겠단다. 줄을 서야 먹는다는 식당에 가니 대기 번호 13번. 행인은 거의 없고 식당과 카페는 붐빈다. 동화 세상과 온갖 물고기가 그려진 담장 벽화들, 조선전기에 축조된 이길봉수대 터가 있는 봉대산을 내다보며 마을을 돌았다. 몸에 붙지 않는다는 육각 모래로 덮인, 1㎞ 길이의 아치형 나사백사장은 갈매기 떼가 점령했다. 맨발의 여고생이 되고 싶었으나 그들의 휴식을 방해할까 싶어 우리는 오래된 열정을 나긋하게 다독였다.

나사항 등대는 파란 모자와 붉은 드레스를 입은 늘씬한 여인 처럼 제법 높게 축조되었다. 김동균기자 justgi999@ulsanpress.net
나사항 방파제등대는 파란 모자와 붉은 드레스를 입은 늘씬한 여인처럼 짜임새 있는 창문과 균형미를 갖춰 높게 축조되었다. 김동균기자 justgi999@ulsanpress.net

등대마다 얽힌 설화에 이야기꽃 가득
희고 둥근 몸에 지붕과 문을 파랗게 단, 파도 빛깔의 나사방사제등대 쪽에서 남녀가 걸어 나온다. 포토존에서 한 무리의 소녀들이 손 하트를 만들며 단체 사진을 찰칵찰칵. 방파제를 걸으며 어깨가 젖은 몸을 다 함께 빙그르르 돌려본다. 수평선과 항구와 등대와 마을의 집들이 파노라마로 가슴에 안긴다. 나사리에서 만날 수 있는, 둥근 기운이 확연하다. 해변이 마을 쪽을 향해 반원형으로 굽어든 까닭을 짐작하는 순간이다. 내항에 있는 나사방사제등대는 2013년 10월부터 이곳이 항로의 끝단임을 어둠 저편으로 타전 중이다. 매운 육회칼국수, 뜨끈한 해물칼국수, 충무김밥, 해물파전으로 축축한 몸을 촉촉이 채우고 나사등대로 향한다. 이 등대는 해변에서 가장 멀고, 2000년에 세워졌으니 믿음직한 맏형격이다. 입구에는 길이 274m, 폭 1.8m의 나무데크 산책로가 올 11월 개통을 목표로 길을 늘려간다. 팔각정에서 등산복 차림의 중년들이 음식 보따리를 펼쳐놓고 시끌벅적하다. 멀지 않은 곳, 신고리원자력발전소가 보인다. 지나온 등대 입구에서 본 '간절곶 소망길 스토리텔링' 표지판이 여기에도 있다. '떡바위'와 '대구장끝' 설화를 국어책을 펼친 듯 한목소리로 읽는다. 혈통을 알 수 없는 흰 개가 따라온다. 빨간 옷에 바짝 붙는다. 등대를 만날 땐 빨간 옷을 입고 오자고 입을 모았다. 개가 적록색맹이며 색상보다는 냄새를 좇는다는 것도 잊은 채, 그저 깔깔.

해안가를 따라 카페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는 가운데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해안가를 따라 카페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는 가운데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 홀로 사는 해녀가 물질하던 중 울음소리를 듣고 아기를 건져낸다. 한쪽 다리가 성치 않았으나 손재주가 좋은 걸 알고 대장간을 열어준다. 아이는 해녀에게 갖가지 물건을 만들어주고 이웃들이 모자지간의 도타운 정을 부러워한다. 해녀가 죽자 마을 아낙이 출생의 비밀을 들려준다. 아이는 해녀가 자신에게 젖을 처음 물렸던 대구장끝에 벼락 치는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피뢰침을 꽂고 사라진다. 이후로 마을엔 재난이 피해가고, 등대에서 기도하면 액운을 막는다며, 액때움등대로도 불린다.
 절름발이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나오는 그리스신화가 떠오른다. 헤파이스토스는 못난이로 태어나 부모인 제우스와 헤라에게서 버려진다. 바다에 떨어지면서 절름발이가 된다. 바다의 님프들에게 구조된 후 대장간기술과 금속세공술을 배운다. 뛰어난 손기술로 저를 길러준 그녀들에게 아름다운 장신구들을 만들어주는 이야기와 흡사하기에. 

항구로 돌아오는 어선이 저무는 해가 그린 황금 물결을 타고 있다.
항구로 돌아오는 어선이 저무는 해가 그린 황금 물결을 타고 있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인생의 행복지표와 함께한 소중한 추억
그래서 나사등대엔 등명기를 보호하는 지붕이 없다. 대구장끝 설화의 주인공이 피뢰침을 꽂은 형상으로 항구를 찾는 선박에게 안심 불빛을 보낸다. 기상이변 때의 전기혼 소리도 이곳에서 내보낸다. 무인 등대라서 울산지방해양수산청의 시야도 바다를 향한다. 그 시야에 떡바위가 가득 들어서 있다. 사연인즉 이러하다. 옛날에 떡을 좋아한 할매가 해신들에게 날마다 떡을 바쳐 어부들은 만선으로 돌아온다. 해신들이 먹고 남은 떡이 쌓여 떡바위를 이룬 덕에 파도는 지금까지 마을을 넘보지 못한다고.
 등대는 하양과 빨강이 짝을 이루는 법. 또 하나의 빨간 등대는 어디에 있을까. 나사리경로당 방향으로 차를 몬다. 해안길 굽이 너머에서 빨강이 손짓한다. 평동방파제등대다. 저곳에도 비 내리는 항구에 어선들이 정박 중이리라. 차와 우산을 들락거리다 보니 뜨끈한 차 한 잔이 생각난다. 친구가 추천하는 별채를 갖춘 커피숍으로 갔다. 역시나 줄을 서야 했다. 온돌방에 둘러앉아 세상사와 자녀 이야기를 나누며, 통유리창에 펼쳐진 바다를 내다본다. 회사 직원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급히 하루를 빼낸 친구는 다음 휴가를 손꼽고, 오늘 할 일을 미리 해두었다는 친구는 사업장을 지키는 큰딸이 뿌듯한 모양이다. 중2들과의 언쟁에 지쳐 은퇴한 친구는 커피값을 내고도 만성불면증의 눈두덩이 무겁다.
 "빨간 등대 앞에서 군수 이야기 적힌 표지판 본 사람?"
 "군수? 제사상에 올리는 군소 말야?"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다.
 "이 나사마을에 '둥치'라는 어부와, '소'라는 착한 아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대. 어느 날 둥치가 사람 머리만 한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 왔대. 소가 시어머니의 몸보신을 해드리려고 고기를 삶았는데 크기가 주먹만 해지더래. 그래도 정성껏 상을 차려 올렸건만 먹고 남은 것을 가져왔냐며 시어머니가 호통을 쳐서 며느리를 쫓아냈지. 얼마 후에 둥치가 다시 그 물고기를 잡아서 삶았더니 크기가 역시 주먹만 해지는 거야. 둥치는 아내가 가엾어서 밤잠을 설쳤지. 마침 마을에 미친 여자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에 찾아 나섰더니 바로 아내였어. 왜 군소리라도 중얼거려 보지 않았냐고 둥치는 슬퍼했고 그때부터 그 물고기를 군소라고 불렀대." 친구가 그 얘기를 하는 동안 젖은 옷이 얼추 말랐다. "우리 시어머니는 제사상에 군소를 빠트리면 호통을 치셔. 군소를 군수, 군수 하시면서 말야." 옛날이야기가 다 요새 이야기라며 박장대소하다 보니, 고부간 갈등의 편편이 공기 중을 떠돈다. 그래도 웃음으로 마무리할 만큼 연륜을 굴려 왔으니…. 언제 함께 또 오겠냐며 나사리를 한 번 더 돌았다. 빨간 등대 곁으로 어선 두 척이 항구로 들어선다. 오늘의 작황은 홍합인가 보다. 줄줄이 매달려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검은 것들이 어판장으로 갈 노란 플라스틱 통에 담긴다. 저녁엔 저 싱싱홍합탕으로 한잔, 콜? 말은 그렇게 해도 저녁밥을 기다리는 식구를 위해 입맛만 다시고는 빗길에 오른다. 

김려원 시인
김려원 시인
2017년 진주가을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climbkbs@hanmail.net

이곳에서는 당신이 젖고 나도 젖는다/ 멸치와 갯내, 머나먼 고래도 젖는다/ 숨은 어둠을 끌어내 한나절을 젖는다/ 깊은 밤 뒤척이면 창가로 와서 철썩이는 미역 줄기/ 물과 물이 만나는 항구로 나를 부르는/ 잠든 속눈썹에 기대어 눈뜨는 당신/ 잠든 속눈썹에 떨리는 입술 나지막이 포갤 때/ 먼먼 손톱달까지 아늑히 붉히는 당신/ 이곳에서는/ 붉은부리갈매기도 흰 모래알도 젖는다/ 이곳에서는/ 당신이 나를 두드린 심장이 호 오이~ 호 오이~/ 젖는다, 깊게도 흘러든다

졸시 '나사리 등대' 
 

 "등대는 항로의 안전지표고 친구는 인생의 행복지표니까 꼬부랑할매가 돼도 우리는 만나재이." "오늘 함께 못해 섭섭했대이, 선자도 알았제?" 예의 차 안이 왁자지껄해진다. 와이퍼도 질세라 뻑뻑, 수다 내기를 다시 시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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