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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고마웠어. 잘 지내!'
여자가 건넨 마지막 소식이었다.
 
바다 보러 갈래? 여자의 한마디에 무작정 달려 마주한 곳이었다. 길 하나를 곁에 두고 바다를 접한 작은 카페. 커피향이 은은했다. 햇살이 빗금으로 누운 테이블 위로 이사오 사사키의 'One fine spring day'가 늘어졌다. 늦은 오후의 바다는 보석처럼 반짝거렸고 여자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하얀 커피잔과 잘 어울렸다. 시간은 맑았고 깨끗했다. 남자는 풋풋했고 여자는 싱그러웠다. 말이 없어도 어색함이 없었고 자기 안의 세상에 빠져있어도 무료함이 없었다. 햇살을 받은 여자의 볼 솜털이 몸짓에 따라 투명하게 빛났다. 가끔씩 하얀 먼지 알갱이들이 떠다녔다.
 
격정과 욕망의 물결이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서로의 손을 잡은 채 그 파란 새벽 찬 바닷속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달빛은 고요했고 파도 소리만 꿈틀댔다. 발이 젖고 허리까지 물이 올랐을 때에도, 함께라면 저 끝까지 갈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찰랑거리던 머리, 하늘거리던 원피스는 온통 젖은 채 숨죽였고, 떠오르는 해를 기다리던 그날 차 안의 공기밀도는 높았고 아찔했다. 온 세상이 붉은빛으로 뒤덮였다.
 
카페, 옆 테이블 중년의 소음이 함부로 건너왔으나 평온하고 변함없는 일상이었다. "나중에 읽어봐." 빨간 하트 스티커로 봉인된 편지를 건네주는 여자의 손끝이 떨렸다. 가지런한 작은 글들은 지난 몇 년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이런 적도 있었네' '이 땐 그랬구나' 추억에 젖고 기억을 되살리며 읽어간 시간의 끝, '잘 지내' 마지막 세 음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바람결에라도 여자의 소식이 들려올 법 했지만 아득했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경이로운 순간조차 없었다. 여자의 부재가 가져다준 일상은 오래도록 회복되지 못했다. 전화나 문자 한 통 없는 날들이 길어졌으며, 휴일이면 길을 잃었다. 시간은 남아도는 듯했으나 딱히 이룬 것 없는 무위의 계절이 오고 갔다. 여자와 함께했던 일들은 하지 않았고, 하지 않아서 평온했다. 남자는 몇 해 동안 그 바다를 가지 않았다. 
 
여느 날처럼 햇살은 좋았고 음악은 잔잔했다. 카페는 흔들리는 나무 간판을 떼고 이름을 바꿨지만,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남자는 혼자였다. 분별없던 시간, 방향 없이 아무렇게나 나아갔던 여자가 여과 없이 선명했다. 그땐 너무 순수했거나 서로에 대한 환상에 부풀어 있었다. 더 이상 기억이 낡아지기 전 여자를 보내줘야 한다. 놓아버려야 절망으로 평안하다. 그래야 추억이 가벼워진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따뜻하게 다가와 다정하게 건너갔던 날들을 정리했다. 
 
'…고마웠어. 잘 지내?' 
남자가 건넨 마지막 소식이었다. 글·사진=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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