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
냄새
  • 울산신문
  • 2021.11.25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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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읽는 금요일] 정경아 수필가
정경아 수필가
정경아 수필가

걷고 싶은 계절이다. 가로수길 은행나무는 황금빛 비늘을 우수수 떨구며 무대 위 초연을 앞둔 주연 배우처럼 우아한 자태로 심호흡을 고른다. 거리의 가장자리마다 샛노란 잎들이 누추했던 길바닥을 포근하게 감싼다. 빈틈없는 노란색의 향연은 봄날의 백화난만(百花爛漫) 못지않다.

"악, 냄새" 함께 걷던 아이가 볼멘소리를 한다. 매캐한 구린내는 눈보다 빠르게 후각을 뒤흔든다. 으깨진 은행나무 열매의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행인들은 은행나무 열매를 밟지 않으려 발아래 동정을 살핀다. 

은행나무의 지독한 냄새는 빌로볼과 은행산이라는 성분 때문이다. 독성을 풍기는 내음은 동물이나 곤충으로부터 씨앗을 지키기 위한 생존 방법이건만 이런 이유로 민원 대상에 오른다. 그물망을 치거나 기계장비를 이용해 다 익지도 않은 열매를 흔들어 수거하는 움직임이 재바르다. 암수를 감별해 수그루만 골라 심기도 한다. 가을 풍경하면 시그니처처럼 떠오르는 나무가 악취 때문에 골칫덩어리로 등극하는 일은 어쩐지 억울해 보인다.

얼마 전, 아파트 앞집에서 새어 나오는 냄새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처음에는 달콤한 캐러멜 향이 나다가 다음에는 시큼하고 달짝지근한 냄새가 났다. 달뜬 비린내였다. 유아의 배설물이 묻은 기저귀를 바로 버리지 않으면 나는 그것. 동시 반사적으로 기억을 후려치는 내음이었다. 공동 현관 유리창을 열려고 해도 고정 장치 때문에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환기가 되지 않으니 악취는 정체돼 뭉글뭉글 뭉쳐지는 듯했다. 며칠 전부터 앞집의 택배 상자가 겹겹이 쌓였건만 아무도 치우는 사람이 없었다. 집을 얼마간 비운 걸까?

다음날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앞집 남자를 만났다. 한 손에는 아이를 붙잡고, 다른 손에는 이불과 어린이집 가방을 들고 있었다. 냄새나는 쓰레기를 빨리 버려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남자는 출근길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가야 해 바빠 보였다. 아이의 엄마가 더 어린 동생을 유모차에 태워 다니던 모습도 통 못 본 것 같다. 행여 누군가 아픈 건 아닌지, 다른 사정이 있어서 집안일이 잘 가동되지 않는 건지 한마디도 물을 수 없었다. "안녕히 가세요"라는 형식적인 말이 오갔지만 상대의 안녕을 진심으로 물어볼 수 없는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았다.

집안으로 들어가는 현관문 키 패드를 켤 때마다 냄새는 되살아났다. 이웃이 괜찮을까 하는 마음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사라졌다. 아파트는 문을 닫고 들어가면 서로의 생활을 전혀 알 수 없는 익명성 때문에 편했다. 하지만 지척에 있어도 안부를 물을 수 없기에 불편이 스멀스멀 생겨났다.

다음날, 냄새가 걷혀졌고 어수선했던 택배 상자들도 사라졌다. 이웃의 무탈함이 감지되자 나의 일상도 평온해졌다.

우리의 후각은 무엇보다 빠르게 오염원을 걸러내기 위해 진화했다. 문명사회 이전, 냄새를 통해 음식의 상태를 살펴 썩은 음식 같은 위험한 요소들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지켜내야 했다. 냄새는 타인과 나를 명확하게 구분 짓지만 이 때문에 서로를 인식할 수 있다. 가로수 은행나무는 자동차 매연을 마시며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투명 인간처럼 서 있다가 종자가 뱉어내는 냄새 때문에 그 존재가 드러난다. 서로 스치며 상관없이 지내는 이웃도 우연히 생겨난 냄새 때문에 안부를 걱정하게 된다. 경계를 넘어온 냄새가 나의 일이 되면서 비로소 보이지 않던 존재가 보인다.

아직 얼마간의 가을이 더 남았다. 은행나무 열매가 발끝에 채이고 뭉개지며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순간으로 만나기까지 3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생의 다급함은 어디에나 있었지만 상대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무수한 은행나무 잎들이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며 떨어진다. 생의 눈부심이 쏟아진다. 이파리마다 "안녕"하고 말을 건넨다. 경계를 뚫고 훅 끼치는 내음은 가을을 완성하는 냄새로 몸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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