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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순옥 플로리스트·시낭송가
윤순옥 플로리스트·시낭송가

외출이 있는 날. 거울 앞에서 단장을 한다. 코로나19 이후로는 외출할 일도 줄었거니와 외출을 하더라도 마스크를 쓰기 때문에 화장을 거의 하지 않게 됐다. 그렇지만 마음이 내키는 날은 마스크와 상관없이 드러나는 눈(目)화장은 한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아이섀도로 눈두덩에 음영을 주고 마스카라까지 꼼꼼히 바른다. 드라이어로 머리를 매만지고 나니 얼굴 단장이 끝났다. 

옷장을 살핀다. 옷장엔 옷들이 빼곡하다. 어떤 옷을 입을까 골라 보지만 막상 손이 가는 옷은 정해져 있다. 대부분 통이 넓고 길이가 긴 편안한 옷들이다. 언제인가부터 몸에 붙거나 무릎 위로 올라오는 짧은 옷은 거의 안 입게 됐다. 어쩐지 민망했다. 한번 입어볼까 싶었다가도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는 도로 벗어버리기 일쑤다. 두루뭉술해진 몸매도 몸매지만 '이 나이에 무슨…'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오래전의 일이다. 시어머니께 옷을 사 드렸다. 자잘한 꽃무늬가 예쁘게 그려진 블라우스였는데 여름옷이라 반팔이었다. 시어머니는 그 예쁜 블라우스를 보고선 첫마디에 '아이고 야야~ 남사스럽구로 팔이 이래 짧아가 우예 입노. 못 입는다'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그때는 그런 시어머니가 야속했는데 이제는 조금씩 이해가 될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옷 입는 스타일이 바뀌니 편안한 옷들을 자꾸 사게 되고 시간이 갈수록 옷은 점점 많아진다. 문제는 예전에 입던 옷들을 정리하고 없애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옷장은 꾸역꾸역 새 옷들을 삼켜 비대해졌고 그 안에서 옷들은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꽉 끼어 헉헉대며 구겨져 있다.

신발도 마찬가지다. 신발장에 뾰족구두가 하나둘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운동화와 단화들이 대신 채우고 있다. 몇 해 전, 딸과 둘이서 유럽 여행을 다녀왔는데 딸이 많이 걷는 여행이라 발이 편해야 한다며 운동화를 한 켤레 선물했다. 발이 편하기도 하거니와 딸의 마음이 예쁘고 고마워서 여행 내내 운동화가 참 편하고 좋다며 노래를 불렀더니 해마다 새 운동화를 보내왔다. 운동화의 편안함을 맛본 덕분에 멋 부리며 신던 롱부츠는 신발장 아래 소중히 뉘어 두고 몇 년째 잠만 재우고 있다. 

잠만 재우는 신발이 어디 그뿐이랴. 버리자니 아깝고 신자니 발이 아파 불편한 것들이 여럿이다. 옷이든 신발이든 혹시나 입거나 신게 되지 않을까 싶어 버리지 못하는 미련한 미련(未練)을 품는다.

마음먹고 옷장을 열었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손이 가지 않은 옷부터 꺼내 빈 종이상자에 담았다. 금세 상자가 한가득 채워졌다. 상자를 한쪽 구석으로 밀어 놓는다. 누군가가 그랬다. 상자에 담아 놓은 옷에 그래도 손이 가지 않으면 그건 정말 버릴 때라고. 옷장과 신발장에 제법 여유가 생겼다. 후련하다. 

옷방 한구석에 밀쳐 놓은 상자가 집 밖으로 나가게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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