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흥덕왕릉 가는 길
 
심수향
 
수많은 그림자 밟고 가야
왕릉이다
뒤틀린 붉은 소나무
헝클어진 그림자
밟을 때마다
소리치며 부서진다
 
마주할 수 없는 진실이거나
견딜 수 없어 거듭한 외면이
여기까지 왔을까
본래 자리 놓치고
그림자만
혼란스런 육신 곁에 남아 있다
 
나무에게는
몸이 마음이라면
그림자는 말이다
그 말 아리도록 절실하여
밟고 서 있는
내가 더 아프다
 
왕릉은 반달같이
볕 바라기하고 있는데
한 발자국
앞장서 가는 그림자
오늘은 나보다 더
솔직하다
 
△심수향: 2003 '시사사' 신인상. 2005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중심' '살짝 스쳐가는 잠깐'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이렇게 11월이 다 간다. 봄날 오후, 능 위로 길게 눕던 그림자를 두고 돌아서며 가을에 와서 소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봐야지 했다. 이제 그 생각을 다시 앞으로 쭉 끌어다 겨울의 어느 날에 리셋한다. 이 시는 봄시동인지 제10호 '어디서 왔는지 모를'에 수록된 작품으로 지난 4월 왕릉기행을 다녀와서 쓴 주제시다. 

 흥덕왕은 왕비 장화부인을 향한 순애보로 잘 알려진 신라의 왕이다. 왕비가 죽은 뒤 암컷을 잃은 수컷 앵무새를 보면서 시를 썼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왕비를 그리워하며 끝내 즐거움을 멀리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읽으며 우리는 능이 자리한 경주 안강으로 향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풍경은 능 입구에 있는 소나무 숲과 그림자들이다. '수많은 그림자 밟고 가야 왕릉이다'라는 이 시의 시작처럼 숲은 저마다 다른 형태로 뒤틀린 붉은 소나무들로 가득했다. 나무가 각자의 그림자를 풀어 한바탕 난리가 난 바닥을 한 발 한 발 밟고 가야 했다. 누구는 춤사위라고 했다. 누구는 아우성이라고 했다. 흥덕왕의 순애보 뒤로 물러나 있던 골육상쟁의 권력다툼이 재현된 듯하다고도 했다. 시인은 그 풍경을 '마주할 수 없는 진실'이나 '견딜 수 없어 거듭한 외면'이 천 년 너머의 서사로 여기까지 왔다고 읽었다. 그림자를 통해서만 들려주던 나무의 말이 절절했기에 그걸 밟고 서 있는 시인 더 아픈 것이다. 통증은 통증을 직면해야만 견딜 수 있다. 그래서 한 발짝 앞서가는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 걷는다. 무게를 먼저 벗어던져서 솔직해진 스스로의 그림자를 앞세우고 봄날 오후를 묵묵히 지나가고 있다. 밟을 때마다 소리치며 부서지는 그림자의 말을 들으며, 그림자를 통해 말하며.  김감우 시인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