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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선화공주를 며느리로 받아들인 백제 왕실. U울림통(79)

 백제 혜왕(惠王)이 즉위 1년도 못돼 죽자 아들 부여선(夫餘宣)이 왕좌에 오르니 제29대 법왕(法王)이다. 

 할아버지 성왕(聖王)은 신라 진흥왕에게 딸을 시집 보내며 나제동맹을 맺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고구려를 함께 물리친다. 신라는 한강 상류를 차지하고 백제는 하류에 머물렀는데 진흥왕이 느닷없이 군사동맹을 깨고 침범해 강 하류를 뺏는다. 이에 성왕은 아들 창(위덕왕)을 내보내 신라 관산성(충북 옥천)을 치려다 오히려 붙잡혀 노비 출신인 신라 장수의 손에 숨져 버린다. 중국과 주요 해상 무역거점을 잃은 백제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맞게 되고 귀족들은 분열 조짐 마저 일고 있었다. 

 불교를 숭상한 법왕은 사비성 인근에 왕흥사(王興寺)라는 큰 사찰을 짓고 살생을 금하며 사냥한 매를 풀어 주고 어부들의 그물 등 어로 도구마저 빼앗아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바닷일로 생계를 잇는 어부들이 나라님에게 어구를 뺏기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불심의 힘이라도 빌려 나라를 안정시키려 했던 법왕기의 위태로운 사회상과 왕의 간절함도 엿보인다. 위덕왕 동생인 혜왕과 법왕은 1년 남짓한 짧은 즉위 기간과 암살로 추정된는 갑작스레 맞게된 죽음에서 이 시기 백제가 정치. 사회적으로 큰 혼란기를 맞았다고 추론되고 있다.  

 그리고 법왕에게 또 하나 근심거리가 있었으니 아들 부여장(夫餘璋, 무왕 武王)의 혼사 문제였다. 장창호 작가는 소리연기를 통해 왕비를 나무라며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하려는 태자 창을 부른다. 

 나제 동맹으로 남하하던 고구려를 물리친 백제는 첫 수도 위례성 고토를 되찾았으나 중국 당나라 뱃길을 잇는 한강 하류를 탐낸 신라에게 뺏긴다. 보복전을 벌이던 성왕이 애절한 죽음을 맞자 신라에 대한 적대적 감정의 골은 더 깊어져만 가는데 태자 장이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데려와 혼인을 하려 든다. 민심은 크게 흔들리고 왕은 고심하다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소리 연기 : 장창호 극작가, 정리 :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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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 보기 : 장PD [85] 법왕 2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능사(陵寺) 절터에서 출토돼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 중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의 모습.  향로 뚜껑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봉황이 화려하면서도 날렵한 날개를 편 모습으로 섬세하게 조각돼 있다. 그 아래 몸체에는 신선이 사는 신산(神山) 사이로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화제를 모은 새의 몸에 사람의 얼굴 형상인 인면조(人面鳥)와 여러 상상 속 들짐승 그리고 원숭이, 악어, 코끼리 등 동물과 17명의 신선. 악기를 다루는 5명의 악사 등 사람이 입체적이면서도 섬세하게 돋을 세김으로 우주만물을 형상화했다.   신선이 살았다고 전하는 중국 박산 모양을 본뜬 이 향로는 불교.유교.도교 사상을 담아 백제만의 독창적인 예술성이 덧보인다. 향로의 수많은 금속 조각은 붙여 만든 것이 아니라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만들어 공예 기술도 뛰어난 사실을 가늠케해 백제 문화를 상징하는 독보적인 문화재이다. 향로가 발견된 능사는 위덕왕(창왕)이 비참하게 숨진 성왕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1993년 주차장 공사 중 우연히 진흙 속에 파묻혀 있다 발견돼 1,500여년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능사(陵寺) 절터에서 출토돼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중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의 모습. 향로 뚜껑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봉황이 화려하면서도 날렵한 날개를 편 모습으로 섬세하게 조각돼 있다. 그 아래 몸체에는 신선이 사는 신산(神山) 사이로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화제를 모은 새의 몸에 사람의 얼굴 형상인 인면조(人面鳥)가 세겨져 있다. 그리고 여러 상상 속 들짐승 그리고 원숭이, 악어, 코끼리 등 동물과 17명의 신선. 악기를 다루는 5명의 악사 등 사람이 입체적이면서도 섬세하게 돋을 세김으로 우주만물을 형상화 했다. 신선이 살았다고 전하는 중국 박산 모양을 본뜬 이 향로는 불교.유교.도교 사상을 담은 독창적인 예술성이 덧보인다. 향로의 수많은 금속 조각은 붙여 만든 것이 아니라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만들어 공예 기술도 뛰어난 사실을 가늠케해 백제 문화를 상징하는 독보적인 문화재이다. 향로가 발견된 능사는 위덕왕(창왕)이 비참하게 숨진 성왕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1993년 주차장 공사 중 우연히 진흙 속에 파묻혀 있다 발견돼 1,500여년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2021. 9. 15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충남 부여군 백제문화단지 내에 재현한 백제금동대향로를 제작중인 공방의 모습.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충남 부여군 백제문화단지 내에 재현한 백제금동대향로를 제작중인 공방의 모습. 2021. 9. 15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난 2007년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왕안리 울성산성 남쪽 기슭 사찰터 목탑지 심초석(心礎石)에서 발굴한 ‘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 출토 사리기(舍利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기로 2019년 국보 제327호로 지정 되었다.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는 청동제 사리합, 은제 사리호, 금제 사리병(사진 왼쪽 부터) 세 겹으로 구성 되어있다.발굴된 기와 명문에 의해 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라는 사리기의 출토지가 분명하고 청동제 사리합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577년(위덕왕 24)에 사리기 제작 시기가 삼국사기 등 문헌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문화재청 출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난 2007년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왕안리 울성산성 남쪽 기슭 사찰터 목탑지 심초석(心礎石)에서 발굴한 ‘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 출토 사리기(舍利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기로 2019년 국보 제327호로 지정 되었다.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는 청동제 사리합, 은제 사리호, 금제 사리병(사진 왼쪽 부터) 세 겹으로 구성 되어있다.발굴된 기와 명문에 의해 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라는 사리기의 출토지가 분명하고 청동제 사리합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577년(위덕왕 24)에 사리기 제작 시기가 삼국사기 등 문헌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문화재청 출처
전북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은 7세기 세워진 세 기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탑(왼쪽)이다. 1974년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서탑(왼쪽)이 있는 절터 동원에서 또다른 탑터가 발굴돼 1992년 익산 미륵사지 동탑을 복원해 서탑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고대국가 시기 사찰의 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단서가 된 탑이다. 지난 2009년 1월 이 서탑의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는데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무왕의 왕후가 창건을 후원하였다는 글이 세겨져 서동설화 진위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 절에는 2개의 석탑과 1개의 목탑이 있었으니 단정하기는 이르다.마를 캐며 자란 서동(薯童)이 백제의 왕(무왕 武王)이 되어 왕비인 신라 선화공주와 어느날 행차 하던길에 홀연히 나타난 미륵삼존불을 만난다. 이에 왕과 왕비가 미륵삼존불이 나타난 자리에 있던 못을 메워 사찰을 짓고 ‘미륵사’라 불렀다. 2021. 9. 16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전북 익산시 금마면 미륵산(용화산)아래의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은 7세기 세워진 3개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탑(왼쪽)이다. 1974년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서탑이 있는 절터 동원에서 또다른 탑터가 발굴돼 1992년 익산 미륵사지 동탑을 복원해 서탑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고대국가 시기 사찰의 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단서가 된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다. 지난 2009년 1월 이 서탑의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는데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무왕의 왕후가 창건을 후원하였다는 글이 세겨져 서동설화 진위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 절에는 2개의 석탑과 복원되지 않은 1개의 목탑이 있었으니 단정하기는 이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마(薯:서)를 캐며 자란 서동(薯童)이 백제의 왕(무왕 武王)이 되어 왕비인 신라 선화공주와 어느날 행차 하던길에 홀연히 나타난 미륵삼존불을 만난다. 이에 왕과 왕비가 미륵삼존불이 나타난 용화산 아래 못을 메워 금당과 탑. 회랑을 각각 3곳에 세워 사찰을 짓고 ‘미륵사’라 불렀다. 2021. 9. 16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국립익산박물관 입구에 전시중인 미륵사지 목탑의 모형. 2021. 9. 16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국립익산박물관 입구에 전시중인 미륵사지 9층 목탑의 모형. 2021. 9. 16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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