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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항 명물인 한쌍의 귀신고래등대는 귀항하는 어부뿐만 아니라 관광객도 반겨 맞고 있다.  김동균기자 justgo999@
정자항 명물인 한쌍의 귀신고래등대는 귀항하는 어부뿐만 아니라 관광객도 반겨 맞고 있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울산 앞바다 어디쯤 도착했을까. 태평양 2만㎞를 헤엄쳐와 솟구칠 그 거대한 몸에는 얼마나 많은 따개비의 상흔이 새겨졌으려나. 동해의 포말이 기운차게 밀려드는 항구 앞에 선다. 즐비한 대게집과 초장집, 활어판매센터를 지나면 붉은 귀신고래가, 정자천을 끼고 들어서면 흰 귀신고래가 반긴다. 허먼 멜빌의 장편소설 '백경'이 떠오른다. 포경선의 선장과 선원들이 '모비 딕'이라는 포악한 흰고래와 목숨 걸고 싸우다 수장되는, 마지막 장면의 바다는 지금껏 목덜미가 서늘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잔잔해진 바다엔 오직 '이슈멜'만 살아남았다. 선장과 선원들과 포경선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은 포경이 아니라 관경에 포커스를 둔다. 세월이 가져다준 변화이다. 눈앞에 있는 고래를 구경하자! 꼬리를 치올리며 잠수하는 고래 모습의 '정자항 아트 스트리트(Art Street)' 간판 앞에 선다. 해양관광 활성화와 휴식공간 조성을 위한 이야기 산책로의 시작이다.

 "옛날 정자항에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는 부부가 살았어요. 아기고래가 육지에 떠내려왔는데 큰 상처가 나 있었지요. 부부는 아기고래에게 물미역을 먹여가며 정성껏 치료했고, 회복한 아기고래는 바다로 돌아갔어요. 여러 해가 지난 후 어부가 풍랑을 맞아 물에 빠졌어요. 배는 산산이 부서졌고요. 어른이 된 아기고래가 어부를 구해주고 미역바위를 선물했지요. 마을 사람들이 고래등대를 세워 그 정성을 기리고 있답니다." 예닐곱 살 꼬마가 엄마의 손을 붙잡고 아기고래 이야기를 또록또록 들려준다.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생글거리는 표정이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 같다. 바다를 배경으로 관객도 연기자도 없는 '라이브 자연극장'을 돌아보는 동안 방파제엔 물결이 밀려든다. 널따란 테트라포드에 서서 달을 낚고 있는 낚시꾼들의 머리 위로 나비가 난다. 어디서 왔을까. "아주 머나먼 나라에 아름다운 나비 한 마리가 살았습니다. 꽃과 나무 가득한 왕국에서 강물이 수풀 사이로 춤추며 흘렀죠. 봄바람 따라 바닷가로…" 시월의 화창한 날에 경주 보문호숫가의 야외 공연장에서 들은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Story of my life)'의 주제곡 '나비(Butterfly)'가 귓가에 나풀거린다. 

 흰 고래에게 가는 길은 고래 뱃속을 지나는 것 같다. 좌우의 구부정한 가로등이 갈비뼈 형태여서다. 문신을 새기듯 고래의 피부에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해온 따개비들 흔적이 정오의 햇살 아래서 꽃같이 빛난다. 정식 이름은 정자항남방파제등대(일명 백고래등대)이다. 동해안에서 더는 보기 어려운 귀신고래가 하늘로 솟구치는 형상으로 2010년에 세웠다. 신출귀몰한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Gray Whale)'는 일제강점기 때 과도한 남획으로 심각한 멸종 위기종이다. 울산 앞바다엔 1960년 중반에 마지막으로 나타났고, 현재는 러시아 사할린 앞바다에 130여 마리가 서식한다. 수심이 낮은 해안지대의 개펄에서 바다 벼룩이나 새우 같은 갑각류를 헤집어 먹기에 얼굴엔 상처가, 온몸은 따개비투성이다. 체중 35t, 길이 16m의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식습관이다. 혹등고래와 더불어 고래뛰기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선박 근처에서 불쑥 솟아올라 입으로 물을 뿜어낸 후 꼬리를 들어 올려 잠수하는 모습이 장관이라고. 11~12월경 울산 앞바다를 지나 동중국해에서 번식하고 5~6월경 다시 이곳을 지나 북상한다. 이제 그네들을 볼 길은 없고 조형 등대로나 만날 뿐. 

 입술에 등명기를 뾰족하게 물고 하늘을 보는 백고래등대의 맞은편에 똑같이 생긴 홍고래등대가 있다. 100m 남짓이지만 눈앞은 시퍼런 바다. 온 길을 되돌아나가는 수밖에. 평일인데도 정자항변 주차장은 만원이다. 횟집 수족관에는 빨빨거리는 대게들이, 찜솥에서는 대게찜이 모락모락 김을 피워올린다. 11월 초부터 5월 말까지인 대게잡이 철. 12월 하순부터 3월 말까지 잡히는 대게를 최고로 친단다. 살이 무른 북한산과 중국산 대게도 들어온다니 등딱지를 잘 살펴야 한다. 검거나 흰 반점이 없고 껍데기가 얇아야 살이 쫄깃하게 씹히는 정자대게다. 활어판매센터에서 수족관 물고기들을 구경하고 다시 물가로 나온다. 항구를 빙 둘러싼 크고 작은 어선들이 하릴없이 일렁인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석 부근에는 온갖 어구가 겹겹으로 쌓이고 쌓여 항구의 정취를 물씬 뿜어낸다. 멜빵바지의 어부와 비닐 앞치마를 두른 아낙은 주낙을 손질하며 어부가인지 만선가인지 모를 민요를 웅얼거린다. 낮술에 거나해진 한 어부가 건네는 술잔을 미소로 사양하곤 낮은 계단을 오른다. 친구 사이로 보이는 여인들이 수평선 쪽으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최근 고층아파트가 부쩍 늘어난 북구 강동동 앞 바다 신명방파제에서 낚시꾼들이 해지는줄도 모르고 낚시 삼매경에 빠져 있다.
최근 고층아파트가 부쩍 늘어난 북구 강동동 앞 바다 신명방파제에서 낚시꾼들이 해지는줄도 모르고 낚시 삼매경에 빠져 있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시끄러운 기계음이 정자항을 끊임없이 나돈 까닭이 이곳 북방파제에 있었다. 울산지방해양수산청에서 정비 중이다. 2023년 말까지 3년간 방파제와 접안시설 들을 새롭게 단장한다. 고래의 눈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면 청정한 대기가 붉은색과 대비되어 드맑다. 붉은 고래는 흰 고래와 같은 날에 구조물 높이 10m의 쌍둥이로 태어났다. 빛이 닿는 거리는 자그마치 11㎞. 백고래등대는 좌현 표지의 녹색 불빛을, 홍고래등대는 우현 표지의 붉은색 불빛을 발산하는 게 다른 점이다. 희거나 붉은 귀신고래는 없건만 등대의 색은 희거나 붉으므로. 붉은 등대를 몇 바퀴 돈 나는 등대 뒤쪽에 서서, 멀지 않은 판지마을의 미역바위 앞쪽에 섬처럼 떠 있는 정자항도제등대를 마주한다. 울산지방해양수산청의 20년 정자항 개발사업이 완료된 2004년 12월에 120m의 도제(육지에서 떨어진 바다에 만든 방파제로 외측의 파도를 막음)와 함께, 구조물 높이 11m의 좌현 표지로 녹색 불빛을 9㎞까지 발산하는 흰 등대가 완공됐다. 국가 어항으로 지정된 정자항과 부근 동해안은 귀신고래의 월동과 번식을 위한 이동 경로여서 천연기념물로 관리 중이다. 오후 2시가 지나니 어선들이 하나둘 항구로 들어온다. 그들의 안식처인 남방파제와 북방파제 곁으로, 항구의 접안시설로. 밤을 꼬박 새운 조황은 만선일까, 정자항의 특미인 참가자미가 그득할까, 2박 3일 여정에 합류한 대게가 가득 실렸을까. 노란 등부표가 뱃길이 만들어낸 파문에 이리저리 몸을 흔든다. 활어판매센터에서 회를 떠서 방파제에 돗자리 깔고 앉아 먹는 맛이 일품이라는데 쌀쌀한 날씨 탓에 사람이 드물다. 다들 초장집의 뜨듯한 방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을 것이다. 

신면항방파제등대의 모습.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경주와 인접한 신면항 방파제등대의 모습.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정자항을 보러 해안도로에 들어서니 꾸덕꾸덕한 참가자미를 파는 평상이 늘어서 있다. 전국 참가자미 유통량의 70%를 차지한다는 명성에 걸맞게 많기도 하다. 뜨끈한 가자미미역국과 가자미구이가 생각난다. 거제에 사는 어머니가 이쯤에 보내주는, 냉장고의 꽁꽁 언 생선들이 떠올라 애써 지나친다. 해변의 크고 작은 몽돌 위를 사그락사그락 걸으며 고래가 지나다니던 먼 바닷길을 본다. 파도에 쓸리는 자갈 소리가 차르르차르르, 이대로 해변을 따라 걸으면 울산의 끝이자 경주의 시작인 지경마을에 도착할 것이다. 연말이라 그런지 경계와 끝이라는 낱말이 자꾸 밟힌다. 지경방파제까지는 6㎞가 넘게 남은 거리. 도중에 북구의 마지막 방파제인 신명항방파제등대에 들렀다. 짧은 방파제에도 테트라포드에도 세월의 때가 묻어난다. 방문만 한 크기의 사각 몸체에 둥근 막대기를 꽂아 등명기를 올려놓은 등대가 아담하다. 한 부부가 등대 밑동에 앉아 컵라면을 먹으며 낚시를 하고, 중년 남자가 큰대자로 찬 바닥에 드러누워 코를 곤다. 맞은편 방파제와 그 앞의 십여 척 낚싯배에는 낚시꾼들이 진을 치고 있다. 울산과 경주를 오가는 물고기는 죄다 걸려들 것 같다. 이곳은 북구청의 지속적인 보강사업에도 불구하고 테트라포드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한다. 방파제를 넘나드는 너울성 파도에 재해를 당한 어업인들의 원성을 뉴스에서 들은 바 있다. 1㎞ 남짓 차를 몰아가니 지경방파제가 훤하다. 붉고 둥근 등대가 작은 항구로 드는 작은 어선을 맞이한다. 방파제 허리께에 '경주바다 지경리'라는 플래카드가 붙어있다. 바다의 경계! 그래도 인간의 땅처럼 평당 가격으로 구획정리되진 않았으니 다행이랄까. 신명항과 지경항의 갯바위가 눈길을 끈다. "나는 나는 갯바위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파도…." 오래전에 즐겨듣던 가요의 구절이 파도를 따라다니다 갯바위에 잘박잘박 부서진다.

김려원 시인
김려원 시인
2017년 진주가을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climbks@hanmail.net

 정자항과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한 카페에 들러 시린 손을 녹인다. 짧은 해가 이울어가는 항구엔 어느새 배들이 들어찼다. 물고기의 비린내를 좋아하는 갈매기가 떼를 지어 난다. 바다와 정자천이 만나는 곳에 내려앉아 먹이를 쫀다. 태풍에 유실되어 표지판만 덩그러니 꽂힌 정자천의 섶다리가 내년 겨울엔 북구청의 도움으로 다시 놓인다고 한다. 바닷가에 줄지은 아파트들은 말없이 높아만 간다. 흰 고래등대, 붉은 고래등대, 도제등대가 귀를 열고 찬 바람에 몸을 씻는다. 어느 날 용오름으로 출몰할 고래가 저를 닮은 모형등대를 보며 신나게 고래뛰기하는 장관을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귀신고래가 월동과 출산을 위해 정자항을 지나기 딱 좋은 계절, 1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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