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장(冊張), 낱낱이 펼쳐진 밤의 숲 
 
강영은
 
시인의 나라는
중립국이다
아군 적군이 없다
 
은유(隱喩)로 빚은
밤의 숲처럼
 
꽃을 꽃이라 말하지 않고
벌레를 벌레로 보지 않는다
 
신(神)을 높이거나
짐승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가지 끝, 허공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지 않는다
 
나무가 되기 이전의
형상들
숲을 채우는 온갖
기호들
너와 내가
약속하기 전까지 몰랐던
상징들
 
말똥이 뒤섞인
지뢰밭에서
처음 죽은 병사처럼
소모전을 치른다
 
죽은 자들만이
장벽을 넘어간다
 
아무도 거할 수 없고
누구도 살 수 없는 언어의
신전(神殿)
 
시인의 나라는 그 숲에
세워진다                   
 
△강영은 시인: 제주 서귀포 출생. 2000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녹색비단구렁이' '최초의 그늘' '풀등, 바다의 등' '마고의 항아리' '상냥한 시론' 등.

박정옥 시인
박정옥 시인

몸이 웅크려드는 계절에는 따뜻한 카페나 난롯가, 햇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서 책의 숲으로 빠져 보면 어떨까. 언어(言語)의 비늘이 활개 치는 이 숲은 아직 우리들의 밤이다. 나무가 되기 이전의 숲은 누구도 거처할 수 없고 기호로써 뿌리내려야만 삶이 가능한 곳이다. 온갖 기호와 은유와 상징이 숲을 채우고 있는 곳, 아군도 적군도 없는 중립국, 꽃을 꽃이라 말하지 않으며 벌레는 결코 벌레가 아니다. 그렇다고 짐승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편 가르기도 없으며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지 않는다. 신을 두려워하거나 높이지도 않는다. 신을 내동댕이칠 수 있고 신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챌 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이 만들어지는 숲이다. 이 숲의 나라에서 소모전을 치루고 장벽을 넘어 선 자와 이 책장의 나라를 낱낱이 순회하는 자, 보물찾기와 같은 상징을 찾아 숨기는 자와 찾는 자가 된다. 
 
 '은유로 빚은 밤의 숲'은 미래로의 배회, 이곳에서 충분히 머무르는 것이 중요하다. 막막한 불안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시절에도 새해는 돌아온다. 그러니 슬퍼하기보다 슬픔에 충분히 머무르고 기쁨과 환희에도 함께 푹 젖다보면 어느새 우리도 강물처럼 흘러가게 된다. 세상은 우리에게 결핍을 가르쳐 주고 무엇을 원하는지 숲의 갈림길에서 상상의 줄을 타고 발자국을 찍어 보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길 밖의 세상을 감각하며 살아보게도 되는 것이다.
 
 누구나 갈 수 있는 시인의 나라는 해질녘 신비한 색조가 마음을 흔들 때,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살고 싶을 때도 이곳은 매우 유용한 곳이다. 쉐다곤의 파고다 황금빛 성지 같은 책장 속이 보여주는 신비한 곳으로, 꿈을 꾸어야만 낮을 살 수 있듯이.  박정옥 시인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