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선물
깜짝 선물
  • 배정순
  • 2022.01.13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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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읽는 금요일] 배정순 수필가
배정순 수필가
배정순 수필가

예능 프로에 중장년의 부부들이 초대됐다. 주제가 '잊을 수 없는 선물'이었지 싶다. 어느 부인이 결혼반지 얘기를 꺼내자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편이 슬그머니 자라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부인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결혼반지로 백금 쌍가락지를 받았었다고 한다. 지금은 백금과 금값의 차이가 없지만, 그 시절엔 혼인할 때 금반지보다는 백금 반지를 더 선호했었다. 부인은 예물 반지인만큼 소중히 간직했다. 

살다 보니 아들이 대학에 가야 하는데 등록금이 없었다. 집안을 둘러봐도 돈 될 만한 것은 없고, 그때 장롱에 고이 간직해 온 결혼반지에 생각이 미쳤다. 그것밖에 목돈 될 만한 게 없었다. 평생 귀한 정표로 소중히 간직해온 반지였지만, 아들 명운이 걸린 일에 망설일 수가 없었다. 반지를 들고 금은방을 찾았다. 감정하던 주인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새어 나왔다. "이 반지는 진품이 아닌 모조품입니다" 추호도 의심 없이 귀한 정표로 간직해 온 결혼반지가 가짜라니!, 귀하게 생각했던 만큼 실망도 컸었다. 거기까지 고백하는 순간 밖으로 나갔던 남편이 들어와 그다음 얘기는 들을 수 없었다. 

남편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손에는 나갈 때와는 달리 뭔가 들려있다.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 허리 굽혀 아내 손에 반지를 끼워줬다. 마치 여태 숨겨 온 사실에 선처를 바라듯이. 부인은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반지 낀 손을 들어 환호했다. 그 자리에서 남편에게 무슨 말이 필요할까. 방청객이 감동의 박수를 보낸 건 물론이다.

세월이 문제해결의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삶에서 불거지는 오류는 어떤 형태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민낯을 드러낸다. 그래서 다들 관계 속에 걸리는 게 없어야 한다고들 하는 것이리라. 더군다나 그게 인생의 전환점인 혼수예물이라면 더하다.

남편은 결혼 후 부인에게 전후 사정을 말해 이해를 구했어야 했다. 아내의 마음에 걸림이 없었다면 그 일을 공개석상에까지 나와 들춰내겠는가. 그때가 언제라고. 뒤늦은 깜짝 선물을 마련한 거로 보아 남편도 그 사실을 잊고 산 건 아닌 것 같다. 감싸 안은 부부의 모습이 따뜻해 지켜보는 마음에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나도 얼마 전 그 비슷한 선물을 받았다. 아들 결혼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다. 아이들은 실반지 하나 나눠 끼기로 했다며 예물 걱정은 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아이들이 필요 없다는 데도 굳이 내가 나섰던 건, 며느리에게는 어떤 이유이든 서운함을 안기고 싶지 않았다. 내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결혼예물이 변변찮았었다. 알고 보니 동서들은 나와는 달랐다. 보석을 탐하는 편은 아니지만 다른 동서들에 비해 내 예물이 약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섭섭했다. 아무리 가진 것 없이 시집왔기로 같은 며느리인데 이럴 수가 있는가. 하긴, 어머님이 그리하신 데에는 사정이 있었다. 넉넉잖은 살림에 손아래 시누이와 우리 결혼을 연이어 치렀다. 미안한 생각이었던지 어머님은 그 후 유럽 여행지에서 나에게만 터키석 목걸이를 사다 주셨다. 하지만, 그것으로 서운한 마음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그 마음을 남편에게 말했을 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나마 결혼의 상징인 쌍가락지 말고는 받은 금붙이는 금 모으기 할 때 몽땅 처분해버렸다. 후일 내가 원할 때 사 줘야 한다는 단서를 붙여서. 살다 보니 이런저런 사정으로 약속이 지켜질 리 없었다. 가끔 말을 꺼내도 그는 못 들은 척했다. 당장이라도 내가 반지 목걸이가 하고 싶다면 못 할 형편은 아니지만, 스스로 산다는 건 의미가 없지 싶어 하지 않았다.

예물을 찾기 위해 보석상에 들렀다. 예비 며느리와 남편이 무슨 얘기를 주고받는가 싶더니 나에게 큼지막한 상자를 내밀었다. 아이들 혼수예물이려니 생각하며 얼떨결에 열어봤다. 상자 속에는 영롱한 빛을 발하는 진주 비드 목걸이가 하트를 그리며 누워 있었다. 내 목걸이라 했다.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깜짝 선물이었다. 남편이 말은 없었지만 내가 했던 말은 흘려듣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값이 만만찮다는 걸 알기에 넙죽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이건 아니지 싶어 물으려 하자, 남편이 곁에서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이럴 줄 알고 비밀에 부쳤다는 것이다. 아이들 결혼예물 할 때 남편이 물밑작업을 한 모양이다.

마지못해 받아들였지만, 내 처지 운운은 허울이고 기분이 좋았다. 목걸이 같은 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생일날 꽃 한 송이 선물할 줄 모르는 무심한 남편이 거금을 들여 목걸이 마련한 그 정성이 감동이었다. 세상을 하직할 때 되면 마음이 변한다던데 여태 멀쩡한 걸 보면 그 속설도 바꿔야 할 것 같다. 

상황은 다르지만 다 가난의 문제였다.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두 남편은 공이 신의를 지킨 셈이다. 나에게 온 목걸이는 주인을 잘못 만나 진가를 발휘하진 못하고 있지만, 사용하지 않아도 마음은 풍요롭다. 한낱 물질의 가치가 아니라 남편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 아닐까. 아마 이 마음은 예의 부인도 동색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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