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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영 수필가·한국시니어브리지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강신영 수필가·한국시니어브리지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노인들의 모임은 특징이 있다. 한나절 내내 같이 어울리다가 밥 먹을 시간이 되면 빠지는 사람들이 많다. "집에 손님이 온다" "갈 데가 있다" "식사 약속이 있다" 등 이유도 다양하다. 동네 사람들끼리 운동 삼아 가볍게 동네 둘레길 산책이나 하자고 했는데 답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왜 못 오느냐고 물으면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 답이 궁색하다.

이런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못 오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돈이 없다는 얘기는 자존심이 있어서 못한다. 수입은 없고 경제권은 아내에게 빼앗긴 상태라서 돈이 없는 것이다. 아내에게 돈을 달라고 하면 용도를 꼬치꼬치 캐묻는다. 누구를 만나기로 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며칠 전에도 만나지 않았느냐며 문책한다. 당구 친다고 하면 쓸데없는 데 돈 낭비한다고 좋은 소리 못 듣는다. 얘기해 봤자 핀잔만 들으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다.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서 호르몬 변화로 중성화된다. 그래서 아내가 습관처럼 지나가는 말로 해도 가슴에 맺힌다. 아내는 여자들끼리 어울려 다니며 맛집을 전전하는데도 남편이 돈을 달라고 하면 순순히 주는 법이 없다. 이런 여인들을 위한 '사모님 정식'이란 메뉴를 만들어 놓은 음식점이 꽤 있다. 보통 식사 메뉴의 2배 값이다. 서울 시내나 교외의 고급 음식점은 이런 사모님들로 북적인다.

누가 식사비용을 내면 눈 딱 감고 얻어먹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도 몇 번이지, 한번은 나도 사야 한다. 그 한 번은 그간 누적된 것을 한꺼번에 토해내야 하는 금액이므로 크다. 그러므로 아예 빠지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다.

멀쩡한 아파트에 사는 사람도 그렇다. 요즘 시세로 몇억 원은 보통이다. 그러나 하우스 푸어다. 집만 있을 뿐이지 현금이 없는 게 문제다. 현금은 아내가 경제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달라는 엄두를 못 내는 것이다. 현금을 안 가지고 다니며 카드만 쓰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카드 한도가 정해져 있어 다 소진해서 있으나 마나 한 경우도 생긴다. 1/n로 나눠 내기로 했는데 지갑을 안 가지고 다녀서 현금이 없다는 사람도 있다. 100달러짜리를 보여주며 미국 돈밖에 없다는 사람도 있다. 구두끈 매느라고 돈 계산 때 머뭇거리는 것은 그래도 봐줄 만하다.

이유를 묻지 말자. 다 사정이 있다.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여유 있는 사람이 내면 된다. 아직 현직에 있는 사람이라면 기분 좋게 베풀면 보기 좋다. 나도 마음으로는 친구들과 식사할 때 내가 사고 싶지만, 내 처지도 뻔한 것을 알고 있으니 내게 얻어먹는 친구들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오만이나 돈 자랑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모이면 1만원 이내의 음식을 먹는다. 보통 노인들은 하루 1만원을 가지고 나온다. 그러므로 메뉴가 대략 정해져 있다. 순댓국, 김치찌개, 동태찌개, 빈대떡에 막걸리 정도다. 점심에 순댓국을 먹었는데 저녁 모임에 또 순댓국집에 가는 경우도 많다. 고기를 먹고 싶어도 고지혈증이 있느니, 우리 나이에는 고기를 피해야 한다며 결국 가는 곳은 늘 가던 곳만 간다. 실제로 그런 이유도 있지만, 돈이 없어서 그런 핑계를 대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그게 하루 이틀이지, 날이면 날마다 그중 하나를 먹어야 한다는 것은 고역이다.

친구들 중에는 스텐트 시술을 받은 사람도 꽤 있다. 혈관이 찌꺼기로 막힌 것을 현대 의학으로 뚫어주는 시술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특히 먹는 메뉴가 까다롭다. 기름기 있는 음식은 절대로 피하려 한다. 내가 좋아하는 곱창을 먹으러 가자고 하면 아예 모두 도망쳐 버린다. 고기도 못 먹고 심지어 기름으로 튀겼다며 빈대떡도 사양한다. 생선회는 원래 안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비싸다고 안 먹는다.

내 수입으로는 한 달에 100만원 정도 나오는 국민연금이 전부다. 그만하면 혼자 사는 데 지장이 없다. 그런데 어떤 달은 카드사 청구 금액이 20만원~30만원 정도 나오는 달이 있다. 돈을 아껴 썼으니 칭찬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재미없게 살았다는 성적표인 것이다. 지출이라고는 주로 음식점에서 먹는 것이 대부분인데 그렇게 아꼈다고 큰돈이 저축되는 것도 아니다. 흥청망청 돈을 쓴다는 것은 지탄받을 일이지만, 국민연금 한도도 다 못 쓴다는 것도 잘하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먹는데 쓰는 돈을 늘리고 싶었던 것이다. 혼자 가면 4인 자리를 차지하니 음식점에서도 좋아하지 않는다. 밑반찬도 최소 2인 이상으로 만들어져 있어 혼자 오는 사람은 반갑지 않은 것이다. 아예 2인분 이상의 메뉴도 많다. 혼자 가면 안 팔거나 혼자 2인분을 먹어야 한다. 두 집 건너 독신 가구라는 데도 아직 혼식이 일반화되지 못했다.  

아직은 건강이 좋은 편이라 다행이다. 비슷한 나이 또래들이 갖고 있는 지병도 없고 치아 상태도 좋다. 그래서 고기도 잘 먹는다. 행복 중에 식도락이 으뜸이라는데 요즘은 음식값이 올라 만원의 행복은 무리다. 만원의 행복은 고만고만한 경제력의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명분의 표어다. 하루 한 끼 식사라도 제대로 먹는 것이 행복이라고 본다. 그래서 식사 때 '아무거나 먹자'고 하는 사람은 실망스럽다. 건강 좋을 때 먹고 싶은 음식이라도 마음껏 먹어 두는 것이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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