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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에 꽃을 들고 
 
백무산
 
봄을 기다리던 때가 언제였던가
겨울을 좀더 붙들어두고 싶어
안달을 해온 때가 또 언제부터였나
 
어릴 적엔 깊고 으스스한 겨울밤이 좋아
아득히 꾸던 꿈들이 흩어질까봐
그 멀고 먼 나라로 데려가던
눈부신 설원이 사라질까봐
그러나 날이 풀리면
정든 이들 살길 찾아 뿔뿔이 떠났기에
땅이 풀리고 고된 노역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펼쳐지는 것은 화원 아니라 화흔이었기에
풀려나온 것은 심장을 찢는 비명이었기에
흩날리는 것은 꽃향기 아니라 피비린내였기에
애도의 회한들이 얼음 풀리듯 터져나오고 
아픈 기억이 짓뭉개진 손톱에 핏물 적시기에
겨울을 오래 붙들어두고 싶었네
꿈은 더 깊어졌으면 했었네
하지만 가버렸네 다 가버렸네
꽃잎 여는 소리를 듣던 두 귀도
잎새 흔들던 바람에도 나비처럼 타오르던 심장도
이제 영영 내 것이 아니네
 
꽃들 난분분한 이 봄날에 한 손에는 꽃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리며
쫓기는 짐승 같은 내 심장을 만져보네
불에 거멓게 덴 심장을
 
△백무산: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로 작품 활동 시작. 이산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오장환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 대산문학상, 백석문학상 등 수상.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외 9권의 시집.

도순태 시인
도순태 시인

지극히 마음을 꺼내 기다린다는 것은 고백일 수도 있다. 안에 쌓인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래 되어 익숙하지만 쉽게 꺼낼 수 없어 서늘한 고백이라 슬퍼진다. '겨울을 좀더 붙들어두고 싶어' 지는 염원 아래 봄을 기다리는 역설적 간절함 속에 시인의 겨울은 먼 나라 설원의 꿈으로 붙들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고백을 따라 가면, 화원은 어디에도 없고 화흔만 남은 아픈 봄이라 시인의 기억을 더욱 겨울에 몰두하게 했지 않았을까? 

 '겨울을 오래 붙들어 두고 싶었네' 시의 후반에서 조금은 동력을 잃은 듯 또 아쉬운 고백이 중심을 잡고 있다. 더 찬란한 봄을 위해 시인의 겨울이 단단해지길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대하는 봄이 점점 멀어져 갈 것 같은, 그래서 시인의 봄은 아프다. 나비처럼 타오르던 심장이 있어야 할 봄은 상처로 얼룩져 있고 치유할 수 없는 시간으로 쫓기고 있었는지도. 봄은 상관없이 또 온다. 이제 양손에 꽃 가득 들고 환하게 맞이하는 내 것이 되길. 겨울이 간다 또 겨울이 온다.  도순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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