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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울림통] 85. 적국 여인과 사랑에 빠진 아비지...황룡사 구층목탑 (2)
신라 여인과 사랑에 빠진 아비지...황룡사 구층목탑2. U울림통(85)

  백제의 특사 자격으로 신라로 건너온 아비지(阿非知)는 황룡사에서 구층목탑 건립공사에 뛰어들어 전력을 다하나 건축 총책임자로 온 선덕여왕의 매제인 김용춘(金龍春)과 사사건건 맞닥 트리게 된다. 

 아비지는 김용춘의 집에 머물며 목탑의 중심기둥 탑주를 세우려 매진하던 어느날 어여쁜 한 여인을 만나 그녀를 가슴에 품게된다. 선덕여왕의 동생 천명공주(天明公主)와 결혼한 김용춘의 딸 아미 낭자였다. 두 사람의 풋풋한 사랑이 커가는 사이 황룡사 3개의 금당 앞에 높이 80m가 넘는 구층목탑의 탑주가 세워졌다.  

  그러나 아비지는 적국의 공격에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게 된다. 이후 아비지는 목탑을 세우던 일손을 멈추더니 몰래 신라를 떠나기 위해 야반도주를 하려 하는데 갑자기 번개 섬광이 내리치고 천둥 소리가 땅을 흔들더니 한 노승과 건장한 장사가 금당문에서 홀현히 나와 탑주와 비슷한 기둥을 세우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또다른 꿈을 꾼다. 이에 아비지는 마음을 고쳐 먹고 탑 공사를 다시 시작한다.

 장창호 작가는 신라가 고구려. 백제. 일본 등 주변 9개국을 물리치기 위해 황룡사에 225척의 구층목탑을 짓는 사연을 몰랐던 아비지가 뒤늦게 그 까닭을 알게 되고 고뇌하자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연인 아미 낭자를 소리 연기로 펼친다.

 드디어 서라벌에 구층목탑이 우뚝 솟아 오른다. 선덕여왕의 떨어진 위신을 되찾는 기대에 가득 차고 백제에 무너진 대야성으로 흐트러진 신라의 정국과 민심도 수습되고 있는 반면 아비지는 자신의 손으로 적국의 호국 불탑을 세웠다는 현실에 괴로워한다. 끝내 아비지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향해 큰절을 한뒤 강물에 뛰어 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오직 아미 낭자만이 홀로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아비지가 뛰어든 강물로 향한다. 소리 연기 : 장창호 극작가, 정리 :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 울산신문 오디오클립 'U울림통' 바로가기 
 ▶ 영상 보기 : 장창호 [102] 황룡사구층탑3

경주 구황동 황룡사지와 황룡사역사문화관의 전경.  황룡사터의 첫 발굴조사는 박정희 정권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1976년 부터 시작돼 1983년 전두환 정권 중반기까지 8년에 걸쳐 연간 6만 2천여명이 넘는 인력이 투입된 초대형 문화재 발굴사업이었으며 발굴 작업과정에서 숱한 기록들을 갈아 치웠다. 이 조사를 위해 정부가 매입한 민가만 100여채에 면적이 5,000㎡(약 5만6000평)에 이르며 황룡사 절터 규모는 외곽 담장 기준으로 8만2,500㎡(약 2만5,000평)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사찰이다. 2021. 1. 18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경주 구황동 황룡사지와 황룡사역사문화관의 전경.
 황룡사터 첫 발굴조사는 박정희 정권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1976년 부터 시작돼 1983년 전두환 정권 중반기까지 8년에 걸쳐 연간 6만 2천여명이 넘는 인력이 투입된 초대형 문화재 발굴사업으로 발굴 작업과정에서 숱한 기록들을 남겼다고 한다.
이 조사를 위해 정부가 매입한 민가만 100여채에 면적이 5,000㎡(약 5만6,000평)에 이르며 황룡사 절터 규모는 외곽 담장 기준으로 8만2,500㎡(약 2만5,000평)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사찰이다. 2021. 1. 18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황룡사의 복원도. 출처 : 문화재청
황룡사의 복원도. 출처 : 문화재청
진흥왕 35년(574년)에 조성돼 황룡사 중금당에 안치된 청동제 삼불상인 장육존상의 상상도의 모습.  신라 최대 금동불상인 장육존상은 높이 약 5.5m(1장6척), 무게 5.8톤(35,007근)으로 추정되며 1982년 출토된 장육존상 불두상의 머리 조각만이 유일한 유물로 그 크기를 가늠할수 있다. 장육존상 삼존불 좌.우에는 십대제자상 5기씩 전체 10기가 배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주 황룡사역사문화관 출처
진흥왕 35년(574년)에 조성돼 황룡사 중금당에 안치된 청동제 삼불상인 장육존상의 상상도의 모습. (출처 : 경주 황룡사역사문화관)
신라 최대 금동불상인 장육존상은 높이 약 5.5m(1장6척), 무게 5.8톤(35,007근)으로 추정되며 1982년 출토된 장육존상 불두상의 머리 조각만이 유일한 유물로 그 크기를 가늠할수 있다. 장육존상 삼존불 좌.우에는 십대 제자상 5기씩 전체 10기가 배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황룡사 구층목탑의 중심기둥 아랫돌인 심초석 아래에서 발견된 금동찰주본기(金銅刹柱本記, 보물)의 발견 당시의 모습(사진 위, 복제품)과 복원품의 모습. 1966년 석가탑의 유물을 훔치려다 붙잡힌 2명의 도굴꾼들에게서 압수한 유물 중 2년 전에 황룡사 절터에서 도굴한 금동찰주본기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었다.  황룡사 금동찰주본기는 목탑 중심기둥을 세우는 것과 관련된 유래를 4장의 금동사각판( 가로 22.5 X 세로 23.5 cm) 앞.뒤면에 930여자 글과 호법신(護法神)과 함께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경문왕 12년(872)에 황룡사 구층목탑을 수리하면서 선덕여왕 12년 (643)의 목탑 건립과 중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해 목탑 하단 심초석 아래 사리공(舍利空)에 넣었던 것이다. 목탑은 1238년 고려 고종 25년 몽골 침입때 불태워져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황룡사 구층목탑의 중심기둥 아랫돌인 심초석 아래에서 발견된 금동찰주본기(金銅刹柱本記, 사진 위, 문화재청 제공)와 황룡사역사문화관에 전시중인 복원.복제된 금동찰주본기.
1966년 석가탑의 유물을 훔치려다 붙잡힌 2명의 도굴꾼들에게서 압수한 유물 중 2년 전에 황룡사 절터에서 앞서 도굴한 금동찰주본기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황룡사 금동찰주본기는 목탑 중심기둥을 세우는 것과 관련된 유래를 4장의 금동사각판( 가로 22.5 X 세로 23.5 cm) 앞.뒤면에 930여자 글자와 호법신(護法神)을 함께 새겨져 있다.
 신라 경문왕 12년(872)에 황룡사 구층목탑을 수리하면서 선덕여왕 12년 (643)의 목탑 건립과 중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해 목탑 하단 심초석 아래 사리공(舍利空)에 넣었던 것이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황룡사구층목탑 홍보 영상에서 목탑의 완공 모습을 바라모는 신라 선덕여왕의 한 장면. 출처 : 황룡사역사문화관
황룡사구층목탑 홍보 영상에서 목탑의 완공 모습을 바라모는 신라 선덕여왕의 한 장면. 목탑은 1238년 고려 고종 25년 몽골군 침입때 불태워져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출처 : 황룡사역사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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