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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원 시인
이서원 시인

유럽에 있는 친구는 가끔 거기 시간으로 새벽 3시쯤이면 내게 문자를 한다. 약 7시간의 시차가 있다 보니 내가 조금 한가한 시간에 맞춰 하루의 안부를 묻는 격이다. 지구가 하나의 생활권처럼 모든 통신은 바로 소통이 되니 이역만리 떨어져 있어도 바로 옆 동네 같다. 우기라서 비가 자주 온다느니, 사람들의 인상이 좋다느니 그곳 소식을 전하면서 염려 놓으라는 배려인 것을 왜 모르랴.

늘 태산 같은 걱정을 붙잡아 놓고 사는 흥감스러운 성격인지라 친구의 잔잔한 소식을 통해 인생사 달관이라도 하라는 양, 안부는 새해에도 어김없으니 이 또한 마음 씀씀이의 따스한 손 내밂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 년 전 조선 후기(1765년) 담헌 홍대용은 숙부를 따라 자제군관 자격으로 35세에 청나라로 가는 사신단에 동행했다. 약 4개월 이상은 족히 걸리는 머나먼 연행길이었지만, 많은 조선인은 연경에서 선진 문물을 목도했다. 오랑캐라고 치부하며 청을 업신여기는 풍토야 쉽게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개, 돼지만도 못한 청나라라고 업신여기면서도 이미 지식인 사이에서는 좋은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 정신 또한 움트고 있었던 터다. 그중 단연 홍대용은 선두그룹이었다. 연경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항주에서 과거시험을 보러 온 엄성이라는 선비를 만난다. 시험공부를 해도 시간이 모자랄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와 일곱 차례나 교우하면서 깊은 호의와 함께 서로를 흠모하게 된다.     

그는 과거에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나 홍대용은 엄성의 마음을 위로하며, 과거보다 더 귀한 글 읽기에 게을리하지 말라는 당부와 위로를 건넨다. 사신단은 이제 다시 조선으로 귀국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한 번 이별하면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니 황천에서 서로 만날 때 아무 부끄러움이 없도록 맹세하자"고 서로 약속했다. 엄성이 직접 그린 홍대용의 초상화를 보면 홍대용은 두 팔을 가지런히 모으고 무릎을 꿇은 채 좌측으로 바라보고 있다. 단정하고 단아한 모습이 선비의 풍모를 지니고도 남았다. 엄성은 홍대용과 깊은 교재를 통해 깨달은 바가 있어 낙향했지만 몇 해를 더 못 살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생전 마지막 날 운명의 시간에도 홍대용이 주고 간 먹을 끌어안고 그를 그리워하고 흠모하며 눈을 감았다 하니 실로 그 마음의 애틋함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엄성과 담헌의 우정을 일러 '천애지기'라고 한다. 

한·중 교류 지성사에서 이만한 우정을 나눈 이가 또 있을까 싶다. 그 당시 조선은 존명반청의 사상이 뿌리 깊이 있었고, 엄성은 한족인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개인의 성향이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만남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깊은 속내를 드러내 보이며 스스럼없이 정치 사상 경제 문화 천문 등의 이야기로 엄청난 교우 관계를 맺게 됐다고 보인다. 

담헌은 그 당시 북벌의 논리를 벗어나 북학으로 나아가자는 신지식이었다. 그는 노론 명문가의 주류에서 태어났지만 비주류의 길을 걸었고, 실학을 통해 조선의 부흥을 갈망했다. 그들의 우정과 빛나는 대화는 조선 사회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후의 연행길에서는 청나라의 많은 선비와 교류가 더욱 활발히 진행되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해가 됐지만 코로나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않고 사람의 만남은 더욱 움츠리고 있다. 이러한 시국에 우리의 세상 인정사 만남의 소중함이 더욱 귀하다. 평생에 한 번 만나고도 저렇듯 '천애지기'로 우리가 이야기하듯이 시국이 어지러울수록 멀리 또는 가까운 친구에게 안부를 묻는 여유를 가지면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를 얻으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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