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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가 자고 있었다는 동굴있는 지룡산.
지렁이가 자고 있었다는 동굴있는 지룡산.

지룡산은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있는 산이다. 울산에서 언양을 지나 청도방면으로 가다 보면 운문터널을 지나게 된다. 터널을 지나면 신원천 이어지고 운문산 자연휴양림을 지나 삼계리 마을에 도착한다. 삼계(三溪)는 세 곳의 물이 합수되어 흐르는 계곡이다. 이곳에서 5분 정도 청도방면으로 가면 운문사 입구 방지초등학교 문명분교가 있는 신원(옛 이름:염창(鹽倉) 삼거리마을에 도착한다.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일대
신라 후기 지금의 운문면 신원리 내포에 한양에서 낙향한 선비 부부가 혼기가 넘은 무남독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선비 부부는 인심도 후덕할 뿐만 아니라 신망이 두터워 마을 사람들로부터 늘 덕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들 부부에게는 쉰에 가까운 나이에 얻은 무남독녀를 좋은 배필을 만나 출가시키는 게 그들의 소원이었다. 부부는 여러 곳에 선 자리를 찾아 딸에게 선을 보였으나 처녀는 번번이 거절하였다. 부모는 애간장이 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처녀가 문을 잠그고 잠을 자고 있었는데, 인기척에 놀라 깨어보니 어떤 낯선 총각이 처녀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얼마나 놀랐는지 소리조차 못 지를 지경이었다. 방구석 아랫목에 쭈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처녀가 정신을 차려 말하기를 "누군데 이 야심한 밤중에 처녀 혼자 자는 방에 들어왔느냐?" 하자 총각이 말하기를 "나는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살고 있으며, 낭자를 주야(晝夜)로 사모하던 끝에 이러한 무례를 범하게 되었으니 너무 책망하지 마시오" 하였다. 처녀는 총각의 말을 듣고 그 풍모를 자세히 쳐다보니 늠름하고 믿음직하게 생긴 사내였다. 순간 처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이끌리게 되었고, 한시라도 총각을 잊지 못하고, 마음을 졸이며 애타게 기다렸다. 
 
# 사람으로 둔갑한 지렁이와 처녀 사이서 태어나
그 뒤부터 매일 밤 자정이 조금 지나면 늠름한 총각이 처녀 방을 찾아들어 사랑을 나누다가 첫닭이 울기 전에 떠나버리곤 했다. 매일 밤 이렇게 지내는 세월이 얼마간을 흘러갔다. 그동안 노부부는 딸을 시집보내기 위하여 곳곳에 좋은 혼처를 놓아 딸에게 선을 보려 하였으나 딸은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막무가내 거절했다. 부모님은 애간장이 타 사모하는 총각이 있느냐 하며, 딸을 다그쳐보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하였으나 그런 일이 없다는 딸의 말을 믿고 나날을 보냈다. 

이렇게 수개월이 지나자 처녀는 임신하게 되었다.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부모 몰래 숨기고, 배를 천으로 싸매어 배가 불러오는 것을 모르게 하였다. 그러나 그런 세월은 얼마 가지 못했다. 결국,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딸을 고이 길러 좋은 혼처를 찾아 출가시키려던 부모의 꿈은 하루아침에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다. 딸을 불러 앉히고 자초지종 이야기를 물으니 딸은 지난 일들을 낱낱이 이야기하였다. 시집도 안 간 딸이 임신했다고 마을에 소문이라도 나면 마을에서 당장 쫓겨나기 십상이라 부모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하루바삐 총각의 집을 찾아가 통혼(通婚)을 하여 혼례를 치르기로 하고 딸에게 총각의 거처와 이름을 물었다. 그러나 딸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하기를 그 총각의 집도 이름도 다 모른다고 하였다. 다만 앞으로 석 달만 기다려주면 소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하니, 그때까지 총각의 거처와 정체를 알려고 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는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려달라고 간청 하였다. 부모님은 딸의 말을 믿고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딸이 임신했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쫙 퍼지고 말았다. 부모들은 딸아이가 임신했다는 소문이 날까 봐 항상 노심초사하던 차에 크게 당황하여 총각의 말대로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내일이라도 당장 총각 부모를 찾아가 혼사를 치르도록 그 총각이 찾아오면 딸아이에게 말하도록 하였다. 

그날 밤 처녀는 찾아온 총각에게 이러한 사실을 자초지종 이야기하고 빨리 혼사를 치를 수 있도록 부탁했다. 그러자 총각이 말하기를 "여보 낭자 이제 한 달도 채 못 남았으니 참고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하였다. 이튿날 이런 사실을 부모님에게 말씀드리니 아버지는 이왕지사 그 총각 말대로 기다려보자고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만일 총각이 그때 가서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면 너는 아비 없는 자식을 낳게 되고, 아이와 너의 신세가 어떻게 되겠냐"면서 통곡을 하자 처녀의 마음도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 명주실 타래로 밝혀진 사내의 정체
며칠 후 딸의 방을 찾아온 어머니가 말하기를 "좋은 방법이 있으니 시키는 대로 하라"며 명주실 한 타래를 딸에게 주었다. 오늘 밤에 그 총각이 찾아오면 그의 옷고름에 명주실을 묶어 두면 거처를 알 수 있을 그것이라고 하였다. 그날 밤에도 총각은 여전히 처녀의 방을 찾아왔다. 처녀는 명주실을 그의 옷고름에 묶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그날 밤은 그냥 지나쳐 버렸다. 어머니의 꾸지람을 들은 딸은 그날 밤 찾아온 총각의 옷고름에 명주실을 묶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 부모들은 명주실을 따라 가보니 지룡산 중턱에 있는 깊은 동굴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동굴 안에는 오색찬란한 광채를 띤 짚동(짚단을 모아 한 덩어리로 만든 묶음)크기만한 큰 지렁이 한 마리가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었다. 순간 부모들은 이 지렁이가 인간으로 둔갑하여 밤마다 자기 딸을 찾아와 괴롭히고 임신까지 시킨 요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렁이가 워낙 커서 잡을 도리가 없었다. 마을로 내려온 부모님들은 이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알렸고 지렁이를 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지룡산의 경관. 운문사와 북대암이 보인다.
지룡산의 경관. 운문사와 북대암이 보인다.

# 염포 바닷물 길어와 소금만들어 물리쳐
여러 가지 궁리 끝에 노인이 노루가죽을 구해서 지렁이의 머리에 덮어씌우면 지렁이가 죽는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나 지렁이가 워낙 커서 아무리 큰 노루가죽이라도 지렁이 머리를 단번에 덮어씌우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고민에 빠진 마을 사람들은 지렁이의 상극(相剋)이 소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렁이에게 소금을 뿌리면 지렁이가 죽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마을에 있는 소금을 모두 모아 봤지만 짚동크기만한 큰 지렁이를 죽이기는 턱없이 부족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마(牛馬)를 대동하여 아낙들은 머리에 물통을 이고 남정네들은 등짐을 지고 울산 염포까지 가서 바닷물을 길어오기로 하였다. 길어온 바닷물을 가마솥에 넣고 불을 때서 소금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만든 소금을 지렁이가 자고 있는 동굴에 갔다 뿌리니 지렁이는 죽고 말았다. 그날 밤부터 그 총각도 처녀의 방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 훗날 지룡산성 쌓고 왕건과 결사 항쟁
그 후 달이 차서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자라서 후백제 왕 견훤이 되었고 황간견씨(黃磵 甄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신원리의 옛 지명은 염창1)(鹽倉)이었다. 또한, 견훤은 신라를 정복하기 위하여 지룡산 일원에 지룡산성2)(견훤산성)을 쌓았고, 운문사 일원에서 군사들을 훈련을 시켜 포석정에서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즐기는 신라 경애왕을 암살(자살)하고 얼마 동안 신라를 섭정(攝政)하기도 하였다. 

KBS 인기 대하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수차례에 걸쳐 견훤은 왕건과 전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수적인 열세나 수세에 몰렸을 때, 왕건의 군사들에게 포위를 당할 지경이 되었을 때도 견훤은 극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도망을 하게 된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고려의 첩자가 견훤이 지렁이의 화신(化身-위기에 처했을 때 견훤이 지렁이로 둔갑하여 땅속으로 숨어버린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왕건의 군사(軍師)에게 알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안 왕건의 군사(軍師)는 영산강 전투에서 영산강 부근에 진을 치고, 모래사장에 소금 수백 포대를 뿌리고 기다린다. 적의 공격이 시작되고 왕건은 견훤과 싸우다가 슬그머니 전세가 불리한 듯 군사들을 물려 후퇴하면서 미리 소금을 뿌려놓은 영산강 강변으로 견훤을 유인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견훤은 군사 삼만 중 몇천을 남겨두고 왕건에게 대패하게 된다. 이 싸움은 백제 견훤을 몰락 일변도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견훤은 군사를 정비하고 재건을 위해 애를 썼으나 백성들에게 인심을 잃어버리고, 결국 맏아들 신검에게 왕위에서 쫓겨난 후 금산사에 유배되었다가 후에 등창으로 죽고 만다. 이러한 전설을 뒷받침하듯 청도 운문사 북대암이 자리하고 있는 산 이름이 지룡산이고, 운문사 입구 마을을, 염창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필자가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염창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김말태(65) 씨가 자기 부친한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채록한 글임.

진희영 산악인
진희영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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