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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수
 
손경숙
 
한 길을 고집했다 하여
전문가라 칭할 수는 없을 터이다
 
부풀려진 허명을 믿고 찾아온 내방자에
세월 따라 불어난 내 노파심이
알맹이 없는 훈수를 늘어놓고 말았으니
 
행여 키 높이를 감안하지 않고
너무 높은 등주를 제시하지는 않았는지
 
그의 몇 마디 찬사에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잘난 체하는 마음이 
요동치며 일어났던 것을
 
△손경숙: '문학예술' 수필, 시 부문 신인상. 수필집 '해를 끌어올리다' 시집 '대숲에 이는 바람' '낙화에도 뜻이 있다'. 울산중구문학회 이사. 울산수필가협회 회장. 사회복지법인 '함께하는 사람들' 이사장.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뜨끔하다. 내 모습을 들킨 것 같고 내 생각을 들킨 것도 같아서다. 누군가에게 어설프게 훈수를 둔 내 못난 모습이나 누군가의 훈수에 불편했던 내 속마음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양면성은 굳이 입장을 바꿔볼 필요도 없이 우리에게 혼재하는 것 아닌가. 

 일 년 전부터 우리 가족은 2주에 한 번, 40분씩 화상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단체 대화방에 영상 하나를 올리고 거기에 관한 생각이나 수다를 나누는 방식으로 하고 있다. 식구들이 멀리 떨어져 사는 데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이 오래되다 보니 그렇게라도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자는 취지에서 시작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 시작 앞에서 두려웠다. 아이들에게 내가 너무 많이 말할까 봐, 혹은 내 생각 쪽으로 나도 모르게 강요할까 염려가 되었다. 

 말을 줄이고 지갑을 열어야 하는 나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아무리 상기시켜도 소위 그 '결론 병'이나 '훈수질'은 내 내면에 어딘가 자리 잡고 있어 불쑥 튀어나올 수도 있어서이다.

 가볍게 시작한 대화에서는 물론이고 무거운 맘을 좀 내려놓기 위해 속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이야기의 방향이 엉뚱하게 흘러가 버리는 경우를 많이 경험했다. 꼭 '이건 이렇게 해라' 혹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등으로 길어지는 훈수 또는 충고로 일관된 대화는 고민거리를 덜기는커녕 상처만 안고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이 시의 화자 역시 전문가라고 찾아온 내방자와 상담한 후에 자신을 돌아보는 경우이다. "세월 따라 불어난 내 노파심에 / 알맹이 없는 훈수를 늘어놓고 말았으니" 라며 스스로를 경계하고 있다. "행여 키 높이를 감안하지 않고 너무 높은 등주를 제시하지는 않았는지" 염려하고 있다.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의 생에 상담자가 되는 자리란. 특히나 '나'를 전문가로 여기고 찾아온 경우라면 그 무게감은 더할 것이다. 그러니 이리 돌아보고 살필 수밖에.

 손경숙의 두 번째 시집 '낙화에도 뜻이 있다'를 읽으며 시인은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내면의 규율이 단정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시를 마주하니 '삼성오신(三省五身)'이란 말이 생각난다. 하루에 세 번 스스로를 돌이켜 살핀다는 뜻으로 공자의 제자 증자의 말이라고 한다. 언젠가 배운 그 귀한 말을 이 시와 함께 다시 소환하여 거울처럼 앞에 두고 나를 비춰보고 있다.  김감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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