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원적산 북동쪽에 위치한 사면이 수십길 낭떠러지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걸뱅이 잔치바위.
원적산 북동쪽에 위치한 사면이 수십길 낭떠러지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걸뱅이 잔치바위.

천성산은 예로부터 깊은 계곡과 폭포가 많고 또한, 경치가 빼어나 소금강산이라고 불리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양산의 진산은 원적산(圓寂山)이다. 천성산(千聖山)이라고도 부르며,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천성산의 유래는 원효대사가 천명의 대중을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89암자를 건립하고, 화엄경을 설법하여 천명 대중을 모두 득도하게 한 곳이라 하여 그 이름을 천성산(千聖山, 천명의 성인)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원적산에는 걸뱅이 잔치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마치 호랑이 털을 닮은 얼룩덜룩한 형태로 오십여 명이 족히 올라설 수 있을 정도로 둥글고 넓적한 바위이다. 

한때 이곳에 화적떼(표준말은 화적패(火賊牌)로 남의 재물을 빼앗거나 행패를 부리며 돌아다니는 무리)의 소굴이 있었다고 한다. 화적떼는 남의 재물을 빼앗거나 행패를 부리며 돌아다니는 무리로 1830년 무렵 부산, 양산, 서창, 웅상일대를 거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이들은 스스로 홍길동전에서 의적으로 묘사된 활빈당의 후예라고 칭했다.

원적산.
원적산.

# 원적산 북동쪽 난공불락 요새
걸뱅이 잔치바위는 원적산 북동쪽에 있다. 이곳은 동쪽과 서쪽, 북쪽 사면은 산짐승들도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수십 길 낭떠러지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있어 소위 난공불락의 요새라 할 수 있다. 한사람이 백 사람을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곳으로 바위에 올라서면 사방팔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을 거점으로 한 활빈당 무리의 소굴이 있었다. 화적떼들이 나타나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민가에 나타나 칼로 위협하고 재물을 빼앗았는가 하면, 이것도 부족하여 아녀자와 농사를 지을 가축도 끌고 가는 일들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이러한 탓에 이 지역에 사는 백성들의 고초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원적산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희미한 달빛이나 별빛에만 의존하여 은밀히 숨어들어 행동하였기 때문에 인근 마을에 사는 백성들도 이들의 은신처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약탈하거나 훔쳐 온 양식들은 땅에 묻거나 가까운 동굴 속에 숨겨 놓고 수시로 은신처를 옮겨가며 행동했기 때문에 관군들도 이들이 어디에서 나타나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으므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라는 말이 이곳에서 생겨났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떤 때에는 이들의 행동이 너무나 잔인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저기 화적떼가 나타났다 하면 뒷일을 보다가도 숨기에 바빴고, 울던 아이들조차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이러한 화적떼의 행패 등으로 인해 이 지역에 사는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이 지역을 기반으로 밥 동냥으로 먹고살던 거지들도 밥 동냥을 할 수가 없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활빈당 후예 자처 도적떼들
  산속 요새 두고 강도·노략질
  빌어먹던 거지밥까지 긁어가

 "못살겠다" 거지들 산속으로
  난공불락 근거지 들킨 도적들 
  푸짐한 잔치 열어주고 줄행랑

# 극심한 약탈에 피폐해진 민심
우리나라는 1940~60년대에는 먹고살기가 너무 어려워 거지들이 많았던 시절이 있었다. 땅 한 평, 오두막집 한 칸도 없이 움막에서 거적때기를 치고 살면서 먹을 것이 없으니 밥 동냥을 해서 봄철에는 논두렁이나 양지바른 곳에서, 여름철에는 다리 밑이나 개울과 가을철에는 가을걷이가 끝난 논, 밭에서 떨어진 낟알이나 주워 먹고 살았다. 

이들 중에는 처자를 거느리는 거지들도 있었고 나름의 서열과 하는 일들이 뚜렷이 정해져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느 집 굴뚝에 연기가 나오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아침을 먹을 때쯤이면 바가지나 우유 깡통에 철사를 달아 들고 다니며, 집집마다 밥을 얻으려 다녔다. 거지들은 대문, 싸리문 앞에서 서서 "밥 한술 주뼺, 네!" "밥 한술 주뼺, 네!" "밥 한술 주뼺, 네!"하고 기다린다. 

어려운 시절이라 밥술이라도 먹는 집들의 훈훈한 인심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낙들은 먹던 밥과 김치 등을 바가지 등에 담아 들고나와 조금씩 덜어 주었다. 이들은 초상집을 비롯한 회갑, 생일, 잔칫집은 물론, 아무네 집 제삿날이 언제인지 알 정도로 날짜 등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어느 동네 누구네 집 초상이 났다든지, 누구네 집에 잔치가 있다든지 하면 동네 사람들보다 먼저 알고 와 있을 정도였다. 

어느 날, 이 지역에 사는 거지들이 대장 겸, 왕초를 찾아와서 하소연하게 된다. "우리 지역은 화적떼들이 자주 나타나 민심이 흉흉해 며칠째 동냥을 못 한 탓에 풀죽이라곤 먹어보지 못하였으며, 어른 애들은 눈이 서 치 정도 들어가 죽기 직전이고, 오늘 아침에는 개똥이는 저세상으로 갔구먼요. 이대로 이삼일만 지나면 우리 식구 절반은 죽어 없어질 겁니다. 어떤 방책이 없으면 모두가 죽게 됩니다. 죽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냐"고 호소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원성이 대장 겸, 왕초를 향해 쏟아진다. 평상시 왕초는 거지들이 동냥해온 음식으로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심각한 사정을 왕초는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묘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 지역의 지리에 밝은 애꾸눈을 가진 길상이가 화적떼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저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에 화적떼의 소굴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쳐들어가서 먹을 것을 당장 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여기서 다 죽을 수밖에 없소. 여기서 굶어 죽으나 화적떼들에게 칼에 맞아 죽으나 죽기는 매 마찬가지여! 내가 그 길을 소상히 알고 있으니 내일 오시(午時)에 그곳으로 모두 쳐들어갑시다" 이렇게 하여 모인 거지들은 모두 이삼십여 명이 되었다. 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꽹과리와 바가지, 깡통, 양철 솥 등을 철사에 달아 들고 화적떼의 소굴이 있는 잔치바위 주변에서 꽹과리와 바가지, 깡통 등을 뚜드리며 먹을 것을 요구했다. 

낮잠을 자며 숨어 있던 화적떼들은 자신들의 은신처가 발각된 것에 겁을 먹고 허겁지겁 한두 명은 숨기도 하고, 담력이 큰 화적들은 거지들에게 달려들어 칼을 휘두르며 죽이려고 몰려들었고, 숨어 있든 패들과 합세하여 쫓는 자와 쫓기는 자와의 실랑이가 한참 동안 벌어졌다. 

졸지에 찾아든 거지들에게 소굴이 발견된 이상 화적떼들은 더 이상 이곳이 안전한 곳이라고 할 수 없었다. 화적떼들은 거지들에게 화친을 요구했다. 무슨 일로 너희들이 이곳에 몰래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가? 당장 너희들 모두를 단칼에 베어 버릴 수도 있지만, 이유만이라도 물어보고, 죽이겠다. 

왕초가 "너희들이 민가에 내려가 우리와 나누어 먹을 곡식과 음식을 모두 너희들이 약탈해 가지고 가서 우리 거지 모두가 굶어 죽게 되었으니 먹을 것을 다오"하였다. 이때 번쩍거리는 칼을 휘두르며 칼끝을 향해 물을 후! 하고 뿜으며 키가 약 8척 가까이 돼 보이는 험상궂은 얼굴에 커다란 칼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난 두목처럼 보이는 화적떼 무리 중 한 명이 "좋다! 지금부터 이곳의 술과 음식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너희들과 몇 날 며칠이 될지 모르겠지만 음식을 먹으면서 신나게 놀아보자"며 말했다. 

걸뱅이 잔치바위를 증명하듯 주변에는 오래된 냄비 등을 볼수 있다.
걸뱅이 잔치바위를 증명하듯 주변에는 오래된 냄비 등을 볼수 있다.

# 화적 보따리 털어먹은 거지들
이렇게 각설이타령이 시작되었다. 거지들은 꽹과리와 바가지, 깡통, 양철 솥 등을 두드리며 화적떼들과 어울려 각설이타령을 신명 나게 부르며 밤늦도록 놀았다. 필자가 이곳을 수차례 답사하면서 바위틈과 땅속에서 찌그러진 깡통과 주전자, 솥 등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얼씨구 시구 들어간다 / 절씨구 시구 들어간다 /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요놈의 소리가 요래도 천 냥 주고 배운 소리 / 한 푼 벌기가 땀난다 / 품! 품바가 잘한다.
 너 선생이 누군지 남보다도 잘한다 / 시전(詩傳) 서전(書傳) 읽었는지 유식하게도 잘한다.
 논어 맹자 읽었는지 대문 대문 잘한다 / 냉수 동이나 먹었는지 시원시원 잘한다. 
 뜨물 통이나 먹었는지 걸직걸직 잘한다 / 기름통이나 먹었는지 미끈미끈 잘한다.
 
며칠을 굶주린 거지들은 오래간만에 먹어보는 술과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게 되었다. 밤은 점점 깊어만 갔고, 거지들이 신명 나게 노는 틈을 타 화적떼들은 하나둘씩 은밀히 이곳을 떠났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이곳에서는 화적떼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화적떼들이 걸뱅이들에게 잔치를 벌여 주었다 하여 이 바위 이름을 걸뱅이 잔치바위고 불렀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는 필자가 30여 년 전 경남 양산시 웅상읍 소주리에 거주하고 있는 김모(당시 이름을 밝히기 거부) 씨에게서 채록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진희영 산악인
진희영 산악인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