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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삼층석탑을 모티브로 세운 동구 주전항 북방파제등대.  김동균기자 justgo999@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모티브로 세운 동구 주전항 북방파제등대. 김동균기자 justgo999@

몽돌이 유명한 주전(朱田) 바다로 가는 길. 핸드폰에 빠진 둘째 아들을 운전기사로 모셨다. 아지랑이가 창밖에서 낮잠 파일을 나른히 재생한다. 문득 저만치서 눈길을 사로잡는 3층 탑 등대. 바다와 창공, 두 파란을 배경으로 붉디붉다. 저 양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아하! 마을 이름의 뜻이 붉은 밭인지라 빨강으로 염원한 탑등대를 세웠구나. 방파제 끝에 당도하면 별안간 달려드는 파도와 바람에 갖가지 번뇌마저 씻길 것 같다. 방파제의 바다 쪽은 테트라포드의 긴 행렬, 항구 쪽엔 아담한 고깃배들이 장난감처럼 떠 있다. 등대 빛깔인 새빨간 배도 한 척. 반짝반짝, 이 마을의 근원인 붉은 땅이 겨우내 보듬은 새 작물로 사월의 꽃 잔치를 벌였다. 벚꽃 이파리는 윤슬이 되어 바다에 꽃내음을 퍼뜨린다. 주전해안길로 내려선다. 바닷가 마을은 횟집과 카페촌이 어우러져 객을 맞이한다.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벚꽃잎처럼 풀려나온 모양이다. 봄은 봄이다.

통일신라 석탑들과 비슷한 외형
주전항북방파제가 높은 옹벽을 둘렀다. 어른 키의 세 배는 넘어 보인다. 다른 등대들과 달리 이곳은 아래로 계단이 나 있다. 탑기단에서 두 중년이 도시락에 든 생선회 안주로 소주를 들이켠다. 주전회센터가 항구에 있으니 신선하겠다. 드세 드세 잔을 드세, 장부가 잔을 잡으면 삼백 잔은 비워야지, 취하면 그만이고 안 깨면 더 좋은 걸, 저 바다가 술이라면, 저 바다에 누워…. 시선(詩仙)이며 주선(酒仙)인 이백의 풍류를 넘어보려는 짧고 헛된 생각을 거두고, 짠 물이 넘실대는 수평선으로 눈을 돌린다. 고립장애 표지(바다에 고립된 암초 등의 장애물에 설치해 안전항해 유도)인 이덕서 등표가 바다 한가운데를 찜하고 있다. 두루미, 시리, 노랑, 샛돌 등으로 불리는 갯바위가 해안에 늘어섰으니 바닷속에는 몇 배가 넘는 큰 암초가 있을 것이다. 

 한낮의 불콰한 중년들이 가고, 나는 홀가분하게 탑돌이를 한다. 각층 지붕돌 받침의 역계단 형태를 올려다보니 경주의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불국사의 석가탑, 고선사지 삼층석탑, 황복사지 삼층석탑들이 머릿속을 드나든다. 네 탑 모두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 2층 기단을 포함한 세 층의 탑신부와 상륜부까지의 총 높이는 각 13.4m, 10.75m, 9m, 7.3m다. 주전항의 탑등대는 구조물 높이 7.5m, 평균 해수면에서의 높이 13m다. 방파제를 2층 기단으로 친다면 감은사지 탑이요, 상륜부에 둥근 돌이 얹힌 모습으론 석가탑, 몸돌 네 면의 문 장식으로 보면 고선사지 탑, 등대 구조물 높이로는 황복사지 탑과 비견할 만하다. 특징적인 면면을 어우러지게 장식한 모양이다. 융합의 시대, 무슨 양식의 탑인들 어떠하랴. 탑등대를 세운 까닭은 암초와 파도로부터 어민을 보호하려는 발원일 테니. 콘크리트 등대의 숨구멍인 듯 마을과 방파제 쪽으로 난 격자창이 시원스럽다. 꼭대기의 등명기는 밤 바닷길 13㎞를 5초마다 밝힌다. 우현 표지이므로 어선들은 좌측 내항에서 휴식한다. 나무문은 굳게 닫혀 있다.

동구 주전마을의 몽돌해변가.
동구 주전마을의 몽돌해변가.

남방파제 지킴이 하양 철제 등대
방파제를 나오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선다. 179m 길이의 옹벽이 바다를 끌고 나와 있다. 갈매기와 부표, 해녀와 물고기와 해초가 춤추듯 헤엄친다. 바닥에 널린 소라껍데기가 돌리는 나선형 바람 소리를 들으려는데 해녀반신상이 막아선다. 키가 5m다. 해녀상의 겨드랑이에 붙어선 나는 오프라인 해녀의 물질에 잡혀 온 엄지인어공주 같다. 해녀들의 표정이 환하면 훨 좋을 텐데! 아들의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반신상 곁에서 돌미역을 손질하던 두 아낙은 어디로 갔나. 이곳 옹벽은 방파제를 두 배로 높인 뒤로 바다가 안 보이게 되자, 바다 모습을 부조형상으로 단장했다. 10년간 똑같은 풍경이어도 객들에겐 이색적이다.
 맞은편의 주전항남방파제등대로 간다. 입구의 주전수산물협동조합 컨테이너 앞에서 해녀들이 미역을 널고 있다. 색색의 바구니마다 미역 줄기가 꿈틀거린다. 바닷속 암초에 붙어 파도로 단련된 주전 돌미역은 비싸게 팔린다. 오래 끓여도 퍼지지 않는 쫄깃하고 깔끔한 식감이 일품이다. 방파제 갓길에도 미역이 널려 있다. 미역귀 내음이 콧속을 간질인다. 주전항남방파제등대는 9m 높이의 하양 철제 등대로, 샤프하다. 빨강 탑등대보다는 눈에 덜 띈다. 좌현 표지로 밤바다 18㎞까지 5초마다 흰 불빛을 반짝인다. 몸체 여기저기 녹이 슬고 페인트가 벗겨졌다. 작은 어선에서 그물망을 손보는 어부의 주름진 낯빛 같다. 종종 낚시하러 다니는 아들이 물 만난 듯 갯바위를 뛰어다니며 낚시 포인트를 가늠하고 있다. 나는 자갈돌을 밟으며 바윗돌에 앉았다. 어린 홍합, 삿갓조개, 고둥, 따개비, 바위게 등 갯것들이 와글거린다.

불법장비 해루질에 생존권 위협
주전마을 안내판에서 본 어촌체험센터로 간다. 고양이 두 마리가 횟집에서 내어준 눈 붉은 생선 머리를 사이좋게 핥는다. 경사로를 올랐으나 센터는 닫혀 있다. 깔끔한 외벽의 주전해녀의 집도 파도 소리만 들락거린다. 주전어촌계 사무실에선 한 어민과 사무원이 품삯을 계산 중이다. 이 동네서 나고 자랐다는 어촌계장이 '여긴 특별하다'는 말로 주전바다에 대한 애정을 표한다. 울산 연안에 하나뿐인 바다 한가운데의 등표가 첫 얘깃거리다. "50년 전부터 저귈 지켜왔심니더. 부유식이었다가 20년 전에 물 위로 솟은 2m 바위에 고정했다 아닌교. 배들은 저 등표 바깥으로 댕깁니더. 이 일대가 수중 암반이거든요. 제가 어릴 적엔 표식이 없어서 사고 마니 났심더. 시멘트를 실은 배가 갈앉았을 땐 온 동네 마당에 그 시멘트를 발랐고요. 2017년엔 바지선을 끌던 예인선이 부딪쳤심더. 졸음운전했겠지요." 어민들의 연안어업은 2.5~3㎞ 해역까지 가능하단다. 암반에는 돌미역, 전복, 소라 등속이 서식한다. 이런 자연 어장을 유지하는 곳은 방어진과 일산과 주전, 북구 일원이다. 그 외엔 산업화로 인해 양식 어장에 의존한다고.

주전 돌미역을 건조판에 올리는 아낙네.
주전 돌미역을 건조판에 올리는 아낙네.

 어촌계장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수협소식지를 펼쳐 든다. '불법장비 해루질 어업인 생계 타격'. 3월 17일자 1면의 머리기사다. 일반인들의 무분별한 불법 장비 해루질(밤에 맨손으로 얕은 바다의 수산물을 잡는 일)로 113개 어촌계에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내용이다. "자연 증식하는 어패류를 비어업인들이 채취해도 절도가 아니라는 판례가 있거든요. 어업인에겐 어장관리, 자원관리, 생산관리까지 요구하면서 채취해서 팔면 불법이라카니. 양식 포자를 뿌린 데선 일반인 채취가 불법인데 자연산은 합법이고. 그라머 우리한테도 똑같이 적용해야제. 해경도 단속할 근거가 없으니 속수무책이고. 칠팔십 나이의 해녀들이 몸으로 그냥 막아요. 바다는 무정부 상태라니깐요. 작년엔 자연산 홍합 300~400㎏ 따서 동네 사람들한테 다 나눠줬다 아닌교. 실태조사를 한다카지만 실제로 법제화가 될지, 절망시럽심더." 요즘은 SNS를 타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단다. 캠핑카로 숙식까지 하면서 쓸어가니 곧 닥칠 여름이 걱정이라고. "자원관리는 어민들이 하는데 자원이 고갈되면 누가 책임지겠는교. 정부에서 대책을 세워줘야지. 제주도선 지자체장 고시로 이뤄지고 있심더. 해수부장관 훈령으로도 가능한데 안 해요, 안 해. 어민보다 레저인구가 많으니 그라는 거죠. 주전마을 자연어장이 200㏊른데 다이버들에겐 해방굽니더. 심야에 작업하니까 막지도 못하지요 머." 
 일반인의 해루질 행위가 어업인의 생존권을 위협함을 알게 됐다. 수산자원 채취량 감소는 물론, 마을 어장 파괴와 황폐화를 몰고 온다고. 어업인들은 마을 어장의 수중레저법상 레저활동 금지구역 지정, 비어업인이 포획 채취한 수산자원 판매금지 등의 제도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주전마을은 350여 가구 중 어업인이 120여 가구. 40여 가구가 배를 소유하고 있다. 해녀도 40여 명. 일제강점기 때 선발돼온 제주 1세대 해녀의 후예도 몇 남아있다. 주전항도 어촌뉴딜300사업 선정지다. 예정대로라면 이미 준공이 끝났어야 한다. 팬데믹으로 착공조차 못 한 상태란다. 체험관광시설과 어촌소득증대 생활SOC사업으로 수익이 나면 등대 관리자도 뽑고 일자리도 만들고 싶은 희망을 내비친다.

주전항의 얕은 바닷속 암초에 세워진 이덕서 등표.
주전항의 얕은 바닷속 암초에 세워진 이덕서 등표.

멀어질수록 아름답기만 한 곳
촤르륵 쏴르르, 다르륵 다륵다륵, 파도가 몽돌을 쓰다듬는 소리. 몽돌이 몽돌끼리 파랑을 노래한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할머니, 텐트 치는 가족, 아이와 물놀이 하는 엄마, 손잡고 드러누운 연인, 바다에 수제비를 뜨는 청년, 구두 굽이 벗겨져도 신나는 처녀들…. 주전의 노랫소리는 강동해변으로 번져간다. 갈매기들의 놀이터인 기암괴석들 너머로 보이는 두 기의 노란 등표, 주전항 수중방파제남단등표와 북단등표다. 그 사이를 테트라포드가 막고 있어 밤바다 11㎞까지 불을 밝혀 뱃길을 연다. 몽돌을 어루만지는 파도와 벚꽃에 덮인 붉은 땅과 새빨간 탑등대가 멀어진다. 항구를 떠나는 차 안에서 나는 라디오를 켠다. 한 자락 칸초네가 저녁을 붉게 물들인다.

김려원 시인
김려원 시인
climbkbs@hanmail.net

…너에겐 조그만 바다밖에 없지만/ 멀어질수록 너는 아름답기만 하네/ 인어의 노랫소리는/ 지금도 사랑스럽네/ 나폴리에서 태어났다면/ 거기서 죽고 싶을 뿐/ 산타루치아여/ 너를 떠나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E.A.마리오, '먼 산타루치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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