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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살등(981m)은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과 하북면 경계에 있는 산봉우리로 영축지맥의 한 구간이다. 시살등 서쪽 8부 능선에는 신동대라는 자연 동굴(窟)이 있는데 이 곳에서 도를 닦던 신동대라는 도인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시살등(981m)은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과 하북면 경계에 있는 산봉우리로 영축지맥의 한 구간이다. 시살등 서쪽 8부 능선에는 신동대라는 자연 동굴(窟)이 있는데 이 곳에서 도를 닦던 신동대라는 도인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시살등(981m)은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과 하북면 경계에 있는 산봉우리로 영축지맥의 한 구간이다. 시살등 동쪽 지산리에는 임진왜란 당시 영축산 절벽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 석축인 단조성(丹鳥城)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아군은 단조성을 거점으로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산성이 함락되었다. 산성에서 후퇴한 아군은 시살등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전투를 시작하였고, 몰려드는 적을 향해 모든 화살을 퍼부었다. 해서 이 봉우리를 시살등이라 불렀다. 즉, 화살-시(矢), 화살-살, 돌 비탈길-등이다. 시살등 서쪽 8부 능선에는 신동대라는 자연 동굴(窟)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400여년전 신동대가 머물던 자연동굴

신동대굴은 성인이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크다. 길이가 10여m, 폭은 넓은 곳은 5m 정도로 바위를 천장으로 하고, 옆으로 길게 패여 있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다. 굴(窟) 왼쪽 천장에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누군가가 갖다 놓은 항아리가 있어 식수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겨울철에는 비바람을 피하고자 온돌 형태의 구들장을 놓았던 흔적도 보인다. 이곳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430여 년 전 신동대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역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전국의 이름난 명산대천을 찾아 수많은 곳을 다녔지만 길지(吉地)를 찾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양산 원동에서 배내골을 따라 걸어오다가 동쪽 영축산 중턱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주저할 겨를도 없이 무언가에 이끌려 단숨에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멀리서 바라본 대로 그곳은 길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곳에서 나의 뼈를 묻는 한이 있더라도 역학을 공부하여 도를 통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목욕을 재계 하고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린 뒤 하늘을 향하여 자신의 포부를 밝힌 뒤 밤낮 할 것 없이 공부에 매진하였다. 

시살등과 죽바우등의 경관.
시살등과 죽바우등의 경관.

긴 수련끝에 마침내 도(道)를 통하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신동대가 이곳에 온 지 3년이 되는 어느 날 서쪽 하늘에 보랏빛 구름이 생기더니 그 속에서 수십 마리의 백학(白鶴)이 나타나 신동대가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백학들은 지상에 내려앉더니 수려한 용모를 지닌 7명의 젊은이로 변신했다. "우리는 선계에서 내려온 신선들일세. 이곳은 우리가 3년마다 한 번씩 놀러 오는 곳인데 자네가 이곳에서 불철주야 기도를 올리고 있으니…"하며 입맛을 쭉쭉 다시더니 품속에 지닌 호부(護符)를 한 권 주었다. "자네가 여기서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우리와 함께 천계에 올라가는 것은 무리일세. 하지만 지상의 주(主)는 될 수 있을 거야. 이 호부를 몸에 붙이면 어떤 귀신(鬼神)이라도 부를 수 있다네. 귀신을 불러 병을 치료하고, 재난을 막을 수가 있네. 그러나 반드시 의(義)로운 곳에만 써야만 하는 걸세!"

"감사합니다. 하신 말씀 뼛속 깊이 새기겠습니다"하고 머리를 들어보니 7명의 젊은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신동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술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축지법에 능해서 하루에 한양을 오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그는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오만해져 그 술수를 이용하여 한양의 기생들과 놀기도 하였고, 하물며 궁녀들을 탐하기도 하는 등 나쁜 일에도 도술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나라에서는 궁녀들에게 몸에 명주 끈을 매어 두었다가 신동대를 보게 되면 명주실을 신동대 옷에 꿰놓으라고 명하였고, 한양 장안에는 신동대의 방문(榜文)이 나붙었다. 결국, 그의 행적이 탐지되어 신동대를 잡아 오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악행 일삼다 중국 안동땅으로 도망

그는 즉시 중국으로 도망쳐 새벽녘에 중국 안동이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신동대가 어느 주막에 들려 눈을 붙이려 하자 어떤 노파가 마당을 비로 쓸면서 호통을 치기를 "야! 이 새 빠질 인간들아! 조선에 사는 신동대는 하루아침에 수만리를 왔는데 너희들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고 뭣들 하느냐?"고 호통을 치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신동대는 잠이 확 달아나고 말았다. 노파가 자기보다 뛰어난 도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을 알고 노파에게 다가가 자신이 신동대임을 알렸다. 신동대는 노인에게 자신의 부질없는 짓에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자신을 제자로 삼아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노파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오"하며 손사래를 치면서 다른 곳으로 몸을 옮겨갔지만 신동대의 끈질긴 마음으로 용서를 빌자. 노파는 입을 열며 "한양으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장날에 만나는 그 어떠한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지 마시오"라 말한 뒤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의인 만난 후 개과천선 새사람으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을 도와 농사에 전념하였고, 낯선 사람 누구와도 만나지 않으며, 자신의 기도처 부근에도 얼씬하지 않았고, 그의 도술을 의롭게 쓰는 데만 노력하였다. 하루는 식사 도중에 어머니가 소금에 절인 생선을 먹고 싶다고 하자 수저를 내려놓고 곧바로 자반을 사서 돌아왔다. 어머니는 가까운 곳에서 사 온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순식간에 100리 떨어진 마을까지 갔다 온 것이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관군을 도와 왜군을 무찌르는 데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왜군은 1592년 4월 동래성을 함락시킨 뒤 사흘 만에 언양읍성과 시루성을 무너트리고 단조성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단조성의 비밀통로를 찾아낸 왜군은 배내골 방면의 청수골, 신불재를 통하여 물밀듯이 진격해 왔다. 이때 신동대는 적진 깊숙이 숨어들어 적을 교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적의 동태를 낱낱이 조선군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의병활동으로 큰 공

임진왜란 당시 동래에서 한양으로 진격하는 왜군은 신불산 단조성에서 번번이 보급로가 차단되자 단조성을 지키고 있는 조선군을 먼저 무찔러 함락시켜야만 보급로가 원활하게 이송되어 한양으로 진격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활과 창으로만 무장한 조선군은 바람 앞의 등불 격이었다. 수많은 전사자를 낸 조선군은 영축산 능선을 따라 퇴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조성의 본영이 함락되자 방어망을 구축한 최후의 보류지 시살등에서 배수진을 친 조선군은 밀려오는 왜군을 향해서 마지막으로 반격의 기회를 노리기로 하였다. 

통도사에서 온 승려들과 밀양, 삼량진 등지에서 모여든 의병들이 힘을 합하여 왜적을 향하여 수많은 화살을 퍼부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당시 조선군과 의병군들의 시신은 계곡을 가득 메웠고, 흐르는 계곡물은 핏빛으로 변하여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까지도 흘렀다고 한다. 하물며 이곳에 자생하고 있는 개구리는 지금도 배가 붉은색을 띠고 있다고 하니 당시 시살등에서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였음을 과히 짐작할 수 있다. 

노파의 경고 잊고 바람고개서 최후

세월은 흘러 그는 자신을 깨우쳐 준 노파의 예언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느 날 장터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말았다. 결국, 그는 그날 밤 도라지고개(일명 바람고개)를 넘어오다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 뒤 신동대가 살았던 동굴에는 어떤 할머니가 들어와 걸식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 동굴 한 모퉁이에서 할머니가 먹을 만큼의 쌀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욕심이 생겨 쌀 구멍을 넓혔다. 그랬더니 더 이상 쌀은 나오지 않고, 대신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고 하며, 할머니는 예전처럼 걸식하며 고생을 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 굴을 신동대의 이름을 따 '신동대굴'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바위 천장에는 물이 흐르고 있다. 또한 신동대가 살았던 골짜기 통도골은 영화 '달마야 놀자' 촬영장소이었고, 양산시 원동면에서 통도사로 넘어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산 아래 통도골과 합쳐지는 도태정(도를 통한 골짜기)골도 신동대와 관련하여 붙어진 지명 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이야기는 필자가 양산시 원동면 선리에 사는 이강수(당시 67세)씨로부터 채록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진희영 산악인
진희영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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