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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훈 수필가
오병훈 수필가

인왕산과 백악에서 발원한 청계천은 서울 도심을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싱그러운 수변경관을 이루는 천변의 수많은 버드나무. 더위를 식히기 위해 물을 찾는 사람들에게 버들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됐던가. 청계천에 버들이 있어 발길을 머물게 하고 버들의 그림자로 물은 푸름을 더한다. 자잘한 가지는 누군가 큰 빗으로 가지런히 빗질을 해 놓은 것 같다. 바람을 타고 일렁이는 버들가지 모습은 한없이 평화롭다. 맑은 물과 빛깔 고운 버들, 게다가 매미소리라도 들리는 오후라면 천변의 서정은 어느 때보다 즐길 만하다.

버들가지에 새잎이 돋아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가 사나운 꼴을 보고 말았다.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장작개비를 만들고 있었다. 전기톱으로 자르는 그들을 보고 왜 나무를 함부로 자르느냐고 물었더니 꽃가루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가로수와 공원용수로 심은 수십 년 된 버드나무가 꽃가룻병을 일으킨다고 잘못 알려져 잘려나간 적이 있었다. 과연 버드나무는 꽃가룻병을 일으키는 불량수종인가.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는 수양버들을 시의 나무로 지정해 가로수로 심고 있다. 버드나무에서 날리는 종실섬유도 보기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예로부터 종실섬유를 유설(柳雪) 또는 유서(柳絮)라 해 흰 눈으로 봤다. 일본의 도쿄에서는 5월에 버드나무 종실섬유가 날리면 유우(柳雨) 또는 녹색 눈(綠の雪)이라 해 강변에서 축제까지 벌인다. 나무를 보는 눈이 이렇게 다르다.

종실섬유가 화분병을 일으키는 꽃가루가 아니라 해도 물질적인 눈으로 봤을 때는 그리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그렇다면 종실섬유가 날리지 않게 하면 된다. 다행하게도 버드나무는 암수딴그루여서 암나무에서만 씨가 생긴다. 묘목생산을 계획적으로 하면 솜털이 날리지 않는 나무를 가꿀 수 있다. 수나무의 가지를 잘라 꺾꽂이를 통해 묘목을 생산하면 된다. 대량생산한 모든 묘목은 종실섬유가 날리지 않는 수나무인 셈이다.

도연명은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했다. 그가 버들을 심은 것은 열매를 먹기 위해서도 아니요 꽃을 감상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봄에 새잎이 나면 꾀꼬리 노래를 듣고 여름에는 매미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매미소리가 시끄럽다고 나무를 벤다. 자연을 즐기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삽화. ⓒ왕생이
삽화. ⓒ왕생이

동양에서는 버들을 여인에 비유한다. 세기의 미인이라는 오나라의 서시는 허리가 버들가지처럼 가늘었다고 한다. 중국의 문호 임어당은 버들을 일컬어 '솔은 장대한 기품 때문에 뭇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매화는 낭만적 기품 때문에 만인의 애상을 받으며, 버들은 날씬한 가인을 연상케 하는 기품이 있어 만인의 사랑을 받는다'고 했다.

버들은 아무래도 여인의 나무라는 데 공감이 간다. 17세기 중국의 문장가 장조(張潮)는 '버들은 만물 가운데서 가장 사람의 마음을 때리며 감상적으로 만든다. 또 버들을 심는 뜻은 매미를 불러들이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 했다. 버들이라는 평범한 대상도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는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장조는 미인의 조건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미인은 꽃 같은 얼굴을 갖고 있어야 하고, 새 같은 목소리에, 달의 혼, 버들가지 같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미인의 조건에 버들가지처럼 가느다란 허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중국 여인의 호리호리한 허리를 유요(柳腰)라 한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가는 허리를 가진 미인의 애교 어린 몸짓을 유태(柳態)라 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버들 하면 여인이 떠오른다. 버들잎같이 아름다운 눈썹(柳葉眉)을 가진 여인을 최고의 미인이라 했다. 동양 무용의 특징이라면 가느다란 허리에 감기는 부드러운 비단 자락의 펄럭임이다. 그 몸놀림은 살랑대는 버들가지의 녹색 물결 그대로이다. 실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의 일렁임을 유랑(柳浪)이라 했던가.

수질과 공기를 동시에 정화할 수 있는 버드나무를 많이 심는 일이 중요하다. 버드나무는 공기를 청정하게 하고 수질을 정화시켜 주며, 도심에 꾀꼬리와 매미를 불러들이는 운치 있는 나무다. 사람마다 버들의 유순함이 몸에 배면 순리와 질서를 지키는 민주시민이 된다. 버들을 통해 남을 이해하고 부드러운 마음들이 모여 민주사회를 이룩하게 된다. 버드나무는 유해수종이 아니다. 꽃가룻병을 일으키는 나무도 아니다. 공기와 물을 정화하기 위해서라도 태화강변에 더 많은 버들을 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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