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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련 동화작가
장세련 동화작가

'이성과 감성'은 20대 초반에 처음 읽었다.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이었다. 익히 들었던 고전문학은 아니었으나 제목이 주는 매력이 상당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결혼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랬던 만큼 문학작품 속 남자주인공을 면밀히 살피곤 했다. 그런데 이 책 속의 남자들은 어쩌면 이다지도 속물들뿐일까, 한심하다는 생각이 짙었다. 그나마 괜찮다 싶은 남자는 여주인공과 19년이나 차이가 나다니 여주인공이 가엾다는 생각도 했다. 윌러비 때문에 한동안 남자들에게 괜한 경계심을 가졌던 기억도 있다. 당시만 해도 '남성=가장'이라는 등식이 지배적이어서 다소 매력적인 남자는 바람둥이일 거라는 생각에 의심부터 했다. 독자의 입장에서 제목이 주는 의미나 메시지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할 책을 주인공에게 몰입해서 읽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끌리는 마리앤의 열정에 함께 설렜다. 엘리너에게 우유부단한 에드워드를 보면서 답답했고, 윌러비의 속물근성에 흥분하고 분노했다. 상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유린당한 채 식음을 전폐하는 마리앤의 실연에 절망하기도 했던 책. 

 이야기의 중심축은 성격이 정반대인 자매 엘리너와 마리앤의 사랑을 대하는 자세와 관점이다.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의 사랑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다소 통속적인 소설이다.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성격의 엘리너는 과연 언니답다. 마리앤은 엘리너와 판이하게 다르다. 정열적이고 감성적인 성격이 사랑의 방식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모든 유산은 이복오빠에게 넘어가고 세 자매는 어머니를 따라 고향을 떠난다. 엘리너는 함께 지내면서 좋아하게 된 올케의 남동생 에드워드와도 작별하게 되지만 서운함을 내색조차 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변에서 겨우 눈치를 챌 정도로 뜨뜻미지근해 보인다. 
 도덕적이나 내성적인 에드워드도 엘리너에 대한 애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엘리너와의 만남을 반대하는 누나와 어머니 때문에 고뇌할 뿐이다. 이런 에드워드에게 향하는 감정의 농도를 종종 살피는 엘리너와 달리 마리앤은 솔직하고 활달하다. 사랑의 방식도 열정적이다. 즉흥적이고 매력적인 윌러비에게 첫눈에 반하는 것부터 마리앤은 이성보다 감성에 충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적극적인 자신의 마음을 배신당한 순간에도 감정에 숨김이 없다. 

 '이성과 감성'(제인오스틴/송제훈역/연암서가)을 다시 읽으면서 이전의 기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다. 섬세한 문장들이 생각의 깊이를 갖게 했다. 내용은 통속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였다. 책은 읽는 시기에 따라, 독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보는 관점이나 느낌이 다르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책을 대하는 나의 시선이나 자세부터 이전과는 달랐다. 등장인물들의 행동보다는 그들의 감정선을 묘사한 문장에 더 끌렸다. 복잡미묘한 갈등 상황을 섬세하게 그려낸 문장들은 마치 세밀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표현들은 부럽기도 했다. 어쩌면 독자인 내가 현재는 작가이기도 한 까닭인지도 모를 일이다. 매사에 이성적인 엘리너의 심리와, 마음을 있는 대로 표현하는 마리앤의 도드라진 감성은 문장 곳곳에서 드러난다. 자신의 경험과 무관한데도 깊이 공감할 만한 문장들이다. 

 "그토록 가증스러운 너의 적이 누구이든 간에, 너의 결백과 선의가 얼마나 고귀한지 보여줘서 그들의 사악한 승리를 무산시켜야 해. 그런 악의에 대항하는 힘은 높고 이성적인 자부심에 있으니까."
 "나도 그러고 싶어. 나 자신보다 어머니와 언니를 위해 그러고 싶다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비참한데 겉으로 행복한 척을 하라니, 아, 나한테 그런 걸 요구할 수는 없어."
 윌러비에게 배신을 당한 마리앤을 위로하는 엘리너의 말은 아주 이성적이다. 그에 반한 마리앤의 흥분과 분노는 적나라하다. 
 원작은 같을 텐데 어째서 이전에 읽었을 때는 이런 묘사들을 놓쳤을까 싶은 부분들이 많다. 번역서는 역자의 역량도 큰 몫을 하기 때문이리라. 물론 독자인 나의 상황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20대는 많은 부분이 막연한 시기다. 미래에 대한 기대만큼 두려움도 큰 시기다. 한 남자와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결혼을 염두에 둔 시점이었으니, 돌아보는 날이 더 많은 현시점과는 느낌이 확연히 다를 수밖에. 
 사람살이는 거의 비슷하다. 비슷한 이야기가 많은 것도 그래서다. 다만 같은 상황이라도 어떻게 묘사하느냐에 따라 오래 읽히는 책으로 남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생각하게 된 책. 이성과 감성 중 어느 쪽이 좋고 나쁘고를 말할 수는 없지만 나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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