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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켤레의 구두*

손택수
 
구두가 아니라 발을 벗어놓았다
가죽은 발이 빠져나간 뒤에도 부르튼 발을 잊지 못하고 있다
 
해진 가죽 위에 앉은 먼지들은 소멸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아마도 타박이는 저 먼지들이 체액에 젖은 구두 가죽 속으로 스며들어 까맣게 뭉친 빛을 내는 것이리라
 
바람도 눈보라도 들판도 가죽의 살갗 속으로 들어와 어느새 
그들을 닮은 발을 바람벽처럼 안아주고 있는 것이리라
 
세족식이라도 하듯 지상으로 내려온 노을빛이
무쇠솥에 데운 물처럼 발을 품어주고 있다
 
발톱이 돌조각 같았던 사람
무덤구덩이 속처럼 컴컴한 구두에 발을 집어넣는다
 
발등 위에 어린 내 발을 올려놓고 걸음마를 시키던,
낡은 구두만 남겨놓고 그는 어딜 갔는가
 
* 빈센트 반 고흐, oil and canvas, 45x37.5cm.
 
△손택수 시인: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데뷔. 시집 '호랑이 발자국''목련 전차''나무의 수사학''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 동시집 '한눈파는 아이' 등.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고흐의 작품 속 구두를 본다. 신발 끈이 풀어진 '낡은 구두 한 켤레'가 품었던 발이 농촌 아낙의 것이었든 고흐 자신의 발이었든 그 삶은 무척 거칠고 고단해 보인다. 


 이 시에 나오는 '한 켤레의 구두' 역시 해진 가죽과 먼지들로 주인공의 고단한 생을 말해준다. 그런데 시인은 그 구두 속에서 구두가 잊지 못하는 부르튼 발을 보고 있다. 그래서 첫 행에 "구두가 아니라 발을 벗어 놓았다"라고 했다. 

 그림을 찬찬히 보니 발의 형태를 잘 간직한 채 놓여진 구두는 휴식에 든 저녁의 모습이다. 배경으로 칠해진 붉은 빛 또한 지상으로 내려온 노을빛을 닮았다. 무쇠솥에 데운 물처럼 발을 품어주고 있다는 표현에서 가슴에 싸~하니 와 닿는 뭉클함이 있다. 그 마음으로 발등 위에 어린 시인의 발을 올려놓고 걸음마를 시켜주던 또 하나의 낡은 구두를 따라가 본다. 소멸 쪽으로 아득한 유년이 보인다.


 신발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들에서 신발이 가리키는 곳은 주로 과거이다. 신발은 발에서 벗어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입을 여는 경우가 많아서일까? 윤흥길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서 가난한 주인공이 지키고 싶었던 자존심도 아리고, 박목월의 시 '가정'의 아홉 켤레 신발에서 보인 가장의 무게와 애정도 짠하다. 둘 다 신발을 벗은 후의 모습이다. 

 그 외에도 아침에 문득 구두를 신으며, 상가(喪家)입구에 벗어둔 신발을 보며, 묵은 신발을 내다 버리며, 15층에서 떨어진 사람이 벗어둔 신발 등, 신발에서 비롯된 사유는 참으로 무궁하다. 신발이 발을 감싸는 존재이고 발은 사람의 몸을, 그리고 생을 지탱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김감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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