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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원 시조시인
이서원 시조시인

아랫어금니가 영 시원찮다. 밥을 먹을 때 씹기가 여간 불편스러운 게 아니다. 아무래도 단단히 탈이 난 모양인 듯하여 치과에 들렀다. 사진을 찍고 잇몸 치료를 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개운치가 않다. 어금니는 아래윗니가 서로 맞부딪히며 음식을 먹게 도와주는 것이라 그중에서 하나만 탈이 나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다시 들린 치과에서는 치아 뿌리가 탈이 났으니 뽑고 임플란트를 하자고 권유한다. 선뜻 답을 못하고 생각을 좀 한 후 다시 오겠다며 나왔지만 무슨 수를 내긴 내야 할 모양이다. 수십 년을 사용했으니 어찌 온전하랴만 그렇다고 무작정 생니를 뽑아내는 것도 아니다 싶어 망설이게 된다. 

 서로 톱니바퀴가 잘 맞물려야 정상적으로 돌아가듯이 우리 삶도 이와 같다. 함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수십 년을 같이 했다가도 어느 한순간 작은 자존심을 못 견뎌 틀어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나 또한 그런 경험이 없지 않다. 이를 악물고 다시는 안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명상과 사색을 하며 스스로 타이르기도 하고 화해를 해볼까 싶어 용기를 내 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못하고 옹졸하게 돌아서기가 여러 번이다.

 오늘은 한나라 회음(淮陰) 땅의 한신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한신은 가랑이 밑을 지나가는 치욕을 견딘다는 과하지욕(跨下之辱)의 고사성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젊은 시절 그는 늘 큰 칼을 옆구리에 차고 다녔다. 하루는 시장을 지나가는데 불량배가 다가와 시비를 걸었다. "어이 덩치 큰 친구. 큰 칼까지 제법 그럴싸한데" 용기가 있으면 그 칼로 저를 찔러 보라고 했다. 찌르지 못하면 자기 사타구니 밑을 기어서 나가라며 모욕을 주었다. 한신은 칼에 힘을 주며 단박에 빼내어 휘두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죽이고 살인죄로 붙들려 본인마저 죽거나 영어(囹圄)의 신세가 된다면 자신의 원대한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생각 끝에 칼을 버렸다. 불량배의 쩍 벌어진 두 다리 밑으로 납작 엎드려 엉금엉금 기어 지나갔다. 
 "키는 8척인 놈이 배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군. 내 앞에서 벌벌 기다니 쯧쯧!" 
 이 모습을 지켜본 많은 시장 사람들은 한신을 겁쟁이라며 "가랑이 사이로 지나간 놈"이라 불렀다. 날마다 손자병법을 익히며 천하 명장(名將)의 포부를 가진 그가 시골 일개 시장에서 겪은 치욕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더 큰 일을 위해서는 바로 눈앞의 문제에 흥분해서는 안 된다. 굴욕을 견디고 비전을 설계하는 자만이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걸 한신은 익히 알았던 것이다.  

 후일, 한신은 유방을 도와 소하, 장량과 함께 한삼걸로 천하를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며 제후의 반열에 오른다. 그가 과연 젊은 시절 힘이 없어 불량배의 가랑이 밑을 기어갔겠는가. 칼을 휘둘러 불량배를 단번에 제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작은 굴욕을 견딤으로써 살인죄를 면했고 후일 더 큰 일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작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쉽게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다. 시장에서 노니는 불량배 같은 인물이 우리 주위에 어디 한둘이겠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만큼 높고 기개가 충천해도 그것을 다스릴 줄 아는 마음의 평정심은 항시 유지해야 한다. 

 지방선거가 끝이 나자 저마다의 당락에 희비가 갈렸다. 고향 친구도 처음으로 선거에 뛰어들었다. 물론 300여 표라는 초라한 결과로 꼴찌를 하였지만 이미 예견된 일임을 자신이 먼저 알았을 듯하다. 홀홀단신 선거원도 없이 오로지 명함 한 가방만 들고 시골 마을 온 구석구석을 누볐다. 그것이 그가 선택한 아름다운 선거의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유권자는 냉혹했고 친구는 선택되지 않았다. 다시 재기를 노리며 고군분투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성적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수없이 낙선해도 지역민을 위한 정치 그림이 있다면 진심이 통할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모두가 적진이라고 해도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서 한 표를 호소한 아름다운 낙선자의 모습을 여럿 보았다. 힘든 상황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결과에 승복하는 모습에서 더 나은 우리의 미래가 있다고 믿는다. 
 숱한 '과하지욕'을 견디며 삶의 현장에서 묵묵히 나아가고 있는 자신에게 오늘도 응원의 박수를 힘껏 쳐 보자! 그래 잘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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