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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길 수필가
이명길 수필가

양양의 명소인 휴휴암休休菴에 왔다. 
 팔만 사천의 번뇌를 내려놓는다는 곳이라 며칠 쉼을 내세워 찾았다. 눈앞으로 펼쳐진 동해가 유월의 태양 아래 코발트 빛 윤슬로 바스러진다. 발이라도 담그면 금세 초록 물이 들 것 같아 해안으로 이어진 계단 길로 내려선다. 
 휴휴암은 연초마다 방생을 위한 불자들이 전국에서 모여든다. 그걸 증명하듯 바윗길에 물고기를 가두었던 수족관이 초록 이끼 띠를 두른 채 방치되고 있다. 옆에 물고기 먹이를 판다는 안내 글이 붙었고 모여드는 물고기 떼가 황어임을 알리는 현수막도 펄럭거린다.
 발바닥을 닮았다는 바위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있다. 가까이 가 보니 동해의 황어가 모조리 몰려왔는지 물이 새카맣다. 어찌나 득실대는지 진흙탕에서 몸부림치는 미꾸라지를 보는 듯하다. 더구나 사람이 얼씬거릴 때마다 암갈색 몸집이 풀쩍풀쩍 튀어 오르기까지 한다.

 황어는 왜 깊은 바다로 나가지 않은 걸까. 망망대해를 두고 바위 곁에서 사람들에게 보채는 걸로 보아 스스로 먹이 구하는 법을 잊은 것 같기도 하다. 야생성마저 잃은 체 관광객이 던져주는 먹이를 가로채려는 움직임만 치열하다. 아가미 부분에 벌겋게 상처 입은 놈도 여럿 있어 안타깝게도 삶의 이중성을 보는 것 같다. 
 황어는 망망대해에서 생을 꾸리다가 성체로 자라면 강으로 가서 알을 낳는다. 그것이 본연의 습성이고 자연성이다. 물론 사람의 은혜로 방생되었으나 좁은 수족관에서 지냈으므로 천적이 득실대는 바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 또한 그들이 이겨내야 할 삶이고 생존 시련이다.
 안일한 단맛을 알아버린 황어는 생을 위한 싸움에서 이겨야 할 전술 따윈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고행이 없진 않을 테지만 천적의 눈치 안 보고 배를 불릴 수 있는 이곳을 낙원이라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동이 트면 몰려와서 하늘빛이 수면을 채울 즈음 돌아간다는 말도 있다. 
 인간은 자연을 훼손하고 타 생물까지 도륙한다.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죄라며 방생이란 퍼포먼스로 털어낸다. 방생이란 모든 생명체가 인간과 공존하는 의미이다. 불살생과 비폭력을 실천하여 공덕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물고기나 새, 짐승 따위를 놓아주는 불교식 의례로 따지고 보면 이런 생명체는 인간 욕망의 제물일 뿐이다.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저마다 가치성이 있다. 인간은 뱀과 같은 위협적인 존재를 만나면 쫓거나 해칠 생각부터 먼저 하게 된다. 심지어 길가 돌멩이도 제 역할이 있는데 무슨 권리인지 그런 자연성을 쉽게 빼앗는다. 자연의 존재성을 인정한다면 나의 영역을 우선으로 고집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공존을 위배한 행위는 또 다른 영역에서 위안을 찾는다. 물고기 또한 인간의 식용으로 빠질 수 없는 식재료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죄를 씻겠다고 베푼 아량을 다시 입 속으로 넣는다. 이런 일로 굳이 먹이사슬의 의미를 꼽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죄의식을 갖지도 않는다. 
 어떤 삶이든 적응하기가 두렵지 내성이 생기면 그게 자기 삶이 된다. 황어가 저리 사는 건 어찌 보면 선택의 삶일 수 있다. 인간이 방생할 때는 동해의 풍요로운 품에서 더불어 살길 바라서이지만 황어의 일탈도 삶이다. 그러기에 안일함에 젖었다고 몰아붙이는 건 내 어리석음일 테다.
 일부러 황어를 보기 위해 휴휴암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단다. 그러기에 물고기의 재주 값으로 먹이를 주는 건 피치 못 할 일이다. 치열함 속에 만끽하는 풍요로움이 어디 이곳에만 존재할까. 방추형 암갈색 등판에 부서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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