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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임조 동화작가  

요양병원에 계신 엄마한테서 간혹 전화가 걸려온다. 단축 번호 1번에서 6번까지 저장해 놓고 아무 번호나 눌러도 보고 싶은 자식한테 닿는다. 
 
어느 날, 그 전화가 내게로 왔다. 엄마는 먼저 “니가 누고?" 하고 묻더니 내 이름을 씹어먹듯 되뇌고 울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자다 깬 아이처럼 우셨다. 발단은 김치. 김치를 담가줘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엄마는 요양병원에 입원하시기 직전까지 김치를 담가 주셨다. 선천적으로 몸이 건강하지 못한 나는 엄마에게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런 내가 육식을 꺼리고 주야장청 김치만 먹어대서 속죄하듯 일생 동안 김치를 담가 주셨다. 딸이 그토록 잘 먹는 김치를 못 담가 주니 억장이 무너진 것이다.
 
3년 전쯤, 엄마가 요양병원에 입원하시기 전 일이다. 엄마의 치매가 급속도로 진행되던 때였다. 엄마는 마당 한쪽 채마밭에 열무가 하루빨리 자라기를 기다렸다가 내게 줄 김치를 담갔다. 곧장 가져가라는 전화가 왔고 나는 지체없이 달려갔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또 열무가 웬만큼 자라자 며칠 전 김치를 담가 줬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또 김치를 담가 놓고 나를 불렀다.
  
나는 또 김치를 가지러 갔는데 엄마는 일주일 뒤쯤 또 자란 열무를 그냥 두지 못하고 얼씨구나 김치를 담아 전화를 하셨다. 결국 여름 끝 무렵에는 김치냉장고가 열무김치로 차고 넘쳤다.
 
요양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서 김치는커녕 딸 입에 들어갈 물 한 그릇 떠줄 수 없는 엄마의 심정을 어찌 모를까마는 이 눈물바람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방금 김치 이야기를 하면서 우셨다는 것을 잊고 또 우셨다. 그리고 몇 분 후 또 우셨다. 도돌이표를 넘기지 못하면 다음 곡조로 건너가지 못하는 노랫가락처럼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다. 
 
엄마의 기억은 이제 3분 요리를 익히는 시간보다 짧아졌다. 엄마의 기억력 타이머가 바빠지면서 달라진 것 중 가장 뚜렷한 것은 말이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엄마의 말에 일일이 대답했지만 끝없이 반복되는 말에 쉽게 지쳐버렸다. 참다못해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웃는다. 엄마가 죽었으면 죽었지 가지 않겠다던 요양병원에서 서서히 적응해 가듯, 나와 형제들도 엄마의 치매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는 엄마의 기억력이 조금이라도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2주에 한 번씩 면회를 가면 우리는 주로 옛날 이야기를 나눈다. 옛날 일만 대화가 될 뿐 다른 이야기들은 엄마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옛날 이야기를 하면 예전의 그 총명함을 발휘한다. 그럴 때면 엄마의 남은 기억이 날아갈세라 재빨리 주소며 주민등록번호며 자식들 생일을 묻곤 한다.
 
그런데 지난번 면회 때는 엄마의 시선이 자꾸만 밖을 향했다. “엄마, 우릴 안 보고 어딜 자꾸 봐?" 내 응석에 엄마가 물었다. “야야, 저어기 저 산이 혹시 고헌산 아니가?" 엄마는 멀리 보이는 큰 산을 가리켰다. “엄마 저 산이 고헌산 같아?" “그래. 나는 여기가 어딘지, 저 사람들이 누군지 도통 모르겠는데 저 산은 고헌산 같다" 엄마의 말은 맞았다. 우리에게 옆모습을 보이고 있는 그 산은 그동안 보아온 방향이 달랐을 뿐 고헌산이 분명했다. 엄마는 그 산이 고헌산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돌아오는 내내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고헌산은 구석구석 엄마의 발자국이 패인 산이다. 봄이 되어 산나물이 올라오면 빈 보자기를 허리춤에 메고 올라갔다가 이고, 지고, 한 쪽 발로 굴려가며 내려오던 산이다. 자식 농사가 눈 앞을 캄캄하게 할 때마다 고헌산 곰지골 절에 가서 엎드렸고, 꽹과리, 장구를 메고 동네 어르신들과 화전놀이를 가던 곳이다. 
 
엄마는 늘 고헌산에 기대어 살았던 것 같다. 고헌산 아래 논밭에서 농사짓느라 수없이 엎드려 고헌산에게 절했고, 고헌산은 소박하고 고단한 삶이었지만 무탈한 한 생애를 절값으로 내놓았다. 
 
엄마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것은 대부분 그런 것들이었다. 엄마를 기대게 했던 것은 고헌산과 소중한 사람들이 전부였다. 한 사람의 일생에 그것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싶으니 엄마의 눈물도, 엄마의 같은 말도 참지 못했던 것이 죄스러웠다. 
 
이제는 우리 여섯 자매가 엄마를 지탱하게 하는, 기대게 하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몇 십번 되물어도 처음 안 양 유쾌하게 대답한다. 전화기를 붙들고 '눈물 젖은 두만강'과 '개나리 처녀'를 불러 주기도 하고, 모내기를 마쳤다. 감자 캘 때가 되었다고 말해주면 엄마의 눈빛은 먼 곳으로 간다. 
 
엄마의 기억이 사는 기와집 담장에 나팔꽃 덩굴을 올리듯 말할 것이다. 내일 아침 전화로 “저 산이 고헌산이 아니냐?"고 또 수십번을 묻더라도 지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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