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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양옥 시인
오양옥 시인

여러분 좀비(zombie) 영화 어떠세요? 사람마다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가 있지만, 전 좀비 영화는 징그럽기도 하고 너무 대놓고 무서워 즐겨하진 않습니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말을 할 수도 없는 다만 알 수 없는 신음만 지르며 먹을 것을 찾아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좀비. 최근 영화나 게임, 드라마 등에 좀비가 등장하는 것이 제법 많네요. 아무튼 간밤의 꿈에 바이러스 감염으로 좀비가 된 사람들을 피해 다니느라 땀에 이불이 흥건하게 젖었습니다. 눈 뜨자 웬 좀비 꿈 하며 좀비에 대한 개연성을 생각하다 보니 요새 저의 관심사가 죽음이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예로부터 인간이 원하는 다섯 가지 福 중 오래 살아 천수를 누리는 수(壽)가 으뜸이었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부(富), 별 탈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강령(康寧),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사는 유호덕(攸好德),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죽음을 이야기하는 고종명(考終命) 이 중 하나라도 부족하거나 과하면 오복의 형상이 틀어지니 서로 얽혀 있는 복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가로 시작된 인생의 지향점이 인생의 중반부를 넘어서고 있는 지금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것 같기만 한 이 말은 결국 고종명(考終命)을 두고 한 말인데 이를 이루려면 오복의 네 가지가 기본이 되어야 하니 실제로 오복을 다 누린다는 것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환경오염이 심해지고 각종 질병이 창궐해도 인간의 평균수명은 지난 250년 동안 3배로 늘었습니다. 인공지능과 나노기술 등 여러 가지 유전공학의 발달과 결합으로 앞으로 수명은 점점 늘어날 것이 자명해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죽음을 죽음이라 불러서는 안 될 것 같고, 치료하면 나을 수 있는 병(病) 같기도 한 것이 어느 의사의 말처럼 생명 연장을 넘어서 '죽음의 종식'이라는 표현에 익숙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얼마 전 누리호 발사에 성공한 대한민국은 7번째 위성 발사국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꿈은 지구를 넘어선 지 오래되었고 몇백 년 뒤에는 달나라에서 일하는 지구인의 숫자가 꽤 될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우주로 뻗어나가는 인간의 욕망도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것이니 아무래도 그전에 죽음에 관한 연구, 아니 죽지 않으려는 연구가 무성해질 것 같습니다. 

인터넷과 사회적 관계망엔 건강에 관한 크고 작은 정보들이 너무나 많아 선택도 어려워 건강하게 산다는 것이 잘 죽으려는 것인지 죽지 않고 오래 살려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귀가 얇은 우리는 몸에 좋다는 것을 찾아다니고 가벼운 채식부터 시작하여 각종 비타민을 먹으며 자극적인 음식, 술, 담배, 커피를 삼가고, 운동과 함께 식사량을 줄이며, 때론 금욕의 삶을 택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좋아하는 많은 것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는 실상이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져 슬픕니다. 건강한 삶을 산다는 것이 죽지 않으려는 발버둥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바라는 고종명(考終命)의 의미면 좋겠습니다. 

'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단 이승'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을 죽음의 거부로 확대해석하는 게 아니냐 싶기도 하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장수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변함이 없어 바벨탑처럼 높아지는 것이 자칫 위태롭게도 보입니다. 만약 꾸역꾸역 연장된 삶으로 1,000세까지 살 수 있다면 주변의 것이 좋은 것인지 귀한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예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죽지 않는 불멸의 삶이 오히려 형벌로 묘사됩니다. 사랑하는 이가 늙어가는 것을 보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자 저주인지, 함께 늙어가고 죽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새삼 알게 됐습니다. 어쨌거나 기술과 의술, 공학의 발전으로 분명 수명은 연장될 것입니다. 

태어남과 동시에 예정된 죽음, 즐거운 소풍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유, 죽음에 앞선 살아온 삶의 결과물이 공포이든 만족이든 누구에게나 참 공평했습니다. 상상하건대 우리의 삶이 죽음을 피하는 죽지 않으려는 욕망의 도구가 되어버린다면 건강한 삶마저 그저 생을 길게 늘이는 방편이라면 우리의 행복 지수는 어떻게 변하게 될까요? 

살아있으되 죽은 자인, 죽었으되 산 자가 되어버린 의식도 목적도 없이 움직이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좀비의 삶은 억울합니다. 살아있는 송장과 무사안일로 일관하는 삶, 별반 다를 게 없네요.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좀비를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뭘 어떻게 해? 안 잡히게 도망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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